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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탑돌이의 문화재적 가치
- 주제2013년 월정사탑돌이보존회 학술 보고회
- 시대현대시대
- 저자김 용 덕 (한양대 교수)
목차
위로 가기 월정사 탑돌이의 문화재적 가치김 용 덕 (한양대 교수)
1.탑돌이의 발생론적 의의
1) 탑의 기원과 전개
2) 탑돌이의 발생과 의의
2.월정사의 신앙 배경과 월정사 탑
1) 월정사의 창건 배경
2) 8각9층 탑의 성격
3. 문화재로서 월정사 탑돌이의 위상
1) 문화재 지정의 기준
2) 탑돌이 설행의 실상
4. 월정사 탑돌이 전승의 과제
1) 축제화 전략
2) 콘텐츠화 전략
3) 세계화
상세소개
위로 가기탑은 분묘로서 身骨이나 舍利를 넣는 무덤양식에서 기원하였다. 이 건조물의 이름은 梵語 로 stūpa인데 음역하여 率堵婆 藪斗婆 兜婆 蘇偸婆 塔婆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고,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던 塔婆에서 婆를 떼어버리고 塔만 쓰게 되었다. 『摩訶僧祇律』 제 33에는 사리를 넣지 않고 다만 공양 예배하는 뜻의 사당 성격으로 보석이나 돌로 세운 탑 을 支提(制底,caitya,chaitya)라 하여 탑파와 구별하고 있으나 뒤에 이 두 가지의 뜻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경 속에서 석가모니가 탑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 이전부터 행해지고 있던 인도의 고유한 무덤 양식이었던 것 같다. 석존이 가섭불의 사리를 위해 흙을 쌓아 탑을 만들었다 하며, 부처 열반 후 여덟 곳으로 나누어 안치했던 사리탑은 사리신앙이 성행하고 아쇼카왕(阿育王,기원전 268)이 팔만사천 탑을 만들면서, 탑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으로 불교의 전파와 합께 퍼져 나갔다. 『上宮法華經疏』에서 탑을 만드는 것은 원래 사리를 공양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탑은 절의 중심이 되는 예배의 대상 이 된다. 원래는 부처의 사리만 봉안하기 위해 만들었던 탑은 부처의 사리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사리 외에 머리카락 손발톱 치아는 물론 경전을 법사리로 인식하여 넣거나 수정 금 은 같은 보배를 공양물로 넣는 경우가 나타 났다. 스리랑카의 불치사는 부처의 치아를 봉안한 사례며 매년 8월 중에 불치를 모시고 성 대한 ‘페라헤라’ 축제를 벌인다. 감은사탑에서는 사리대신 수정을 넣은 사리함이 발견되었 다. 월정사 탑에서도 『전신사리경』 경이 나왔다. 따라서 탑 속에 넣은 모든 물건은 부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세존은 탑을 조성하여 사리를 넣지 않고 경전을 넣는 것도 좋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경에서 오묘한 이치를 밝혔는데 그 이치는 맑고 깨끗한 것이므로 곧 여래의 맑은 법신이기 때문이다. 이 경을 넣은 탑은 그 경이 곧 사리인 것이다. “약왕이여, 곳곳에서 설하거나 독송하거나 쓰며 혹은 경권이 머물러 있는 곳이면 칠보탑 을 일으켜 매우 높고 넓게 하여 장엄하게 꾸밀 것이나, 사리까지는 반드시 안치하지 않아도 좋으니라. 왜냐하면 이 경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진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탑에는 응당 온갖 꽃과 향과 영락이며 증개 당번 기악과 노래로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하라. 만약 어 떤 사람이 이 탑을 보고 예배하고 공양한다면, 알지어다. 이들은 다 아누다라삼먁삽보리에 가까우니라.” -『묘법연화화경』 「법사품」 이처럼 후대에 이르러 탑은 단순한 분묘로서의 기능을 넘어 본족적인 성격을 가지는 성스 러운 경배의 대상으로 자리한다. 대승불교에서 탑은 단순한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참회와 삼매를 이루는 수행으로 연결되었다. 탑을 조성하면 무한한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공덕 사 상과 탑을 도는 수행을 해도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대승수도 사상 때문에 탑은 대단히 유행하게 되었다. 경전 속에서 탑은 수행과 공덕의 방편으로 제시되어 있다. 『法苑珠林』 에 보면 탑을 쌓은 뜻은 사람이 훌륭하게 되고 신뢰를 쌓고 은혜를 갚기 위함이며, 탑을 도 는 수행을 하면 단정한 몸과 좋은 음성을 얻고, 천상에 태어나고 왕후의 집에 태어나며, 마 침내 열반의 도를 얻은 공덕을 쌓게 된다고 하였다. 탑의 구조는 인도의 산치대탑처럼 그릇을 엎어놓은 형태의 복발형이 원형인데 중국에서 봉분 형태가 누각 형태를 갖는 중국식 목탑으로 변하였다. 중국의 탑은 제일 윗 부분만 인 도탑의 흔적을 보이고 그 아래쪽은 고층 누각 모양의 탑을 만들어 변신을 꾀하였다. 뒤에 중국은 전탑, 한국은 석탑, 일본은 목탑을 중심으로 탑이 전개되었다. 중국 초기의 목탑은 한반도에 전래되어 삼국시대 초기까지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평양부근의 청암리 사 지, 부여 군수리사지, 익산 미륵사지, 경주 황룡사와 사천왕사지, 법주사 팔상전에서 목탑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팔상전을 통해서 초기 탑에 대한 선조들의 인식을 짚어 볼 수 있다. 팔상전은 외부에서 보면 4각 기단에 5층 탑신부와 상륜부로 구성되어있다. 내부는 불 단이 있고 네 벽면에는 부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가 각 면마다 두 장면씩 봉안되어 있다. 석탑이 내부가 밀폐된 구조인데 비해 목탑인 팔상전은 안에서 예배와 수행을 하고 탑돌이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황룡사 탑도 여러 가지 기록과 유물을 통해서 추정하 면 내부에 불상과 보살상을 봉안하고 벽면을 벽화로 장엄하였으며 계단을 통해 9층까지 걸 어올라가 난간에서 경주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목탑은 그 자체 가 경배의 대상이며 그 속에서 예배하는 사람은 곧, 경배의 대상과 일체가 되는 佛我一體의 신앙체험을 할 수 있는 구조였다고 이해된다.목탑은 그 유지와 보수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무대신 돌을 이용한 석탑이 등장하 는데 백제 시대에 세워진 미륵사탑(국보제11호)은 탑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목탑의 구 조를 가지고 있다. 정림사지 석탑을 보면 석재를 다듬어 탑을 세우는 기법은 목탑을 모방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 석탑은 실용적 활용성보다 본래적 의미의 상징으로 조 성된다. 감은사 탑이 이러한 양식의 초기 형식인데 이후의 우리나라 석탑의 정형으로 정립 된다.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석탑의 양식이 크게 변모하였다. 약 1세기에 걸친 지배 기간을 통해 원나라의 문화는 의복과 음식 생활 풍속에 영향을 주었고, 사찰에는 석탑 뿐 아니라 석등 불상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원나라 탑의 형식을 따른 대표적 탑인 경천사 10 층 석탑(국보 제86호,충목왕 4년,1348)은 원나라의 공장이 직접 만들어 상륜부가 라마교 양 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각층 각 면에는 십이회상을 조각하여 불보살 천부 기타 여러 가지 상을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신라말 고려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월정사 탑도 이러한 시대 적 배경에서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