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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臺 寂滅寶宮의 歷史
- 주제中臺 寂滅寶宮의 歷史
- 시대현대시대
- 저자李元錫 (동국대 교양교육원 강의초빙교수)
목차
위로 가기 中臺 寂滅寶宮의 歷史李元錫
동국대 교양교육원 강의초빙교수
1. 머리말
2. 신라시대 五臺佛蹟과 中臺 地宮의 開創
3. 고려시대 月精寺의 발전과 舍利
4. 나말선초 寺庵의 重建과 中臺 寂滅寶宮
5. 조선후기 史庫의 설립과 寂滅寶宮의 변모
6. 맺음말
상세소개
위로 가기일반적으로 寂滅寶宮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所藏處의 앞에 예배를 올리는 장소로 사용되던 拜殿으로 ‘寂滅寶宮’이라는 현 판이 달린 목조건물이다. 현재 한국에서 흔히들 5대 적멸보궁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신라의 고승 慈藏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五 臺山 中臺의 寂滅寶宮 · 양산 통도사 · 태백산 정암사 · 설악산 봉 정암 · 영월 법흥사이다. 두루 알다시피 특히 통도사가 한국의 삼보 사찰로 권위를 누린 것도 실로 부처님의 眞身舍利를 戒壇에 안치한 데에 기인한다. 그런데, 적멸보궁의 역사를 언급하면, 통도사의 경 우 戒壇 남쪽에 현재와 같은 拜殿이 새워진 것은 1645년이고, 심지 어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은 1970년대까지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적멸보궁의 역사를 간직한 곳은 오대 산 중대의 적멸보궁이다. 후술하는 문헌기록을 제외하고도, 중대 적 멸보궁은 외관이 19세기 말의 형식이지만 내부가 조선 전기의 多包 係 건물이라는 실재 증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대 적멸보궁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적다. 체 계적인 학술연구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月精寺聖寶博物館에서 편 찬한 『오대산 적멸보궁의 綜合的 檢討』가 있다. 여기에 게재된 논문은 한국의 진신사리신앙과 사리장신구, 그리고 적멸보궁이라는 건축물에 대한 연구가 중심을 이룰 뿐이고 ‘地宮’을 포함한 ‘적멸보 궁’에 대한 전후의 역사적 맥락은 사실상 배제되었다. 그밖에 풍 수지리적인 관점에서 적멸보궁의 地相을 검토하고 해석한 연구도 있지만, 학문적 접근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사실 적멸보궁의 연구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존재한다. 첫째는 적멸보궁의 연구가 과학적 학문영역과 종교적 신앙영역의 사이에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후자가 보다 강조되는 경향성이 있다. 그런 데, 종교적 신앙 영역은 실로 학문적 접근에 한계가 있을 뿐만 아 니라 논리적 설명도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五臺山 事蹟記』에 기록된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는 그 핵심이 될 것이다. 둘째는 中臺의 ‘地宮’을 창건한 것으로 일 컬어지는 慈藏(576-655)5)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다면성으로 인해 학계의 견해가 多岐한 점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자장의 생몰연도, 입당시기, 중국 오대산의 친견여부, 황룡사9층목탑의 건립여부, 만 년에의 오대산 입산 등 그의 생애뿐만 아니라 계율사상, 화엄사상, 유가사상, 밀교사상 등 자장의 불교사상도 엇갈리는 평가가 적지 않다. 게다가 신라시대 초기 승려라는 점으로 인한 자료 부족과 함께 그의 ‘感通’이나 ‘異蹟’이라는 신앙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 닌 점도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현재까지 자장에 대한 연구서가 별 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은 연 구시대의 장구함이다. 연구시대의 설정은 삼국시대 자장의 地宮 개 창에서 조선후기까지, 어쩌면 일제강점기도 포함해야 한다. 이는 ‘地宮’을 배제하고 麗末鮮初 이후의 ‘적멸보궁’을 위주로 서술하기 어렵다는 인식과도 관련이 있지만, 광범위한 시대설정은 일반적인 연구자가 접근하기에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필자는 중대 적멸보궁의 역사를 접근하고자 한다. 서술의 대상으로는 ‘地宮’과 분리된 ‘寂滅寶宮’이 나 그 불교건축을 위주로 삼기 보다는 양자를 유기적으로 포괄하겠 다. 이와 관련하여 부처님의 身骨과 동일한 범주에 드는 法舍利와 함께 오대산의 불교계의 佛舍利도 가능하면 부기할 작정이다. 또 한, 적멸보궁과 함께 사자암이나 상원사를 포함하는 ‘中臺’의 영역 도 상대적으로 중시하려 한다. 나아가, 논지의 전개상 필요할 경우 에는 월정사를 포함하는 오대산 불교계도 시야에 두겠다. 왜냐하면 사자암이나 상원사는 물론이지만 월정사를 배제하고 적멸보궁을 설 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또한 法舍利의 소장이나 적멸보궁만을 대상으로 삼을 경우 사료의 부족으로 인한 단절과 공백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다만, 五臺寺庵의 중수는 본고의 관심 영역이 아니 므로 다소간의 누락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