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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에 관한 내용분석과 의미

  • 주제「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에 관한 내용분석과 의미
  • 시대현대시대
  • 저자X
목차
위로 가기 「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에 관한 내용분석과 의미
- 信仰體系의 변화와 于筒水를 중심으로 -
Ⅰ. 序論
Ⅱ. 水精菴의 신앙체계 변화
1. 초기의 신앙구조
2. 중창에 의한 변화
Ⅲ. 水精菴과 于筒水
1. 記文의 물에 관한 기록
2. 한강의 시원에 관한 영향
3. 우통수 명칭의 타당성
Ⅳ. 結論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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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은 慈藏 이래 문수보살의 성지로 인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오 대산과 관련된 자료는 『三國遺事』 「塔像第四」 말미의 오대산 관련 기록 4편과 이를 바탕으로 작성된 『五臺山事蹟』, 그리고 權近의 「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 (이하 ‘記文’으로 표기함)와 조선시대 선비들의 기행문 및 시문 등만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중 조선 초의 大儒인 陽村權近의 記文은 고려 말 오대산의 신앙체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말선초의 한양 천도 이후 한강의 시원 비정 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記文은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인 1392년 화재로 소실된 오대산의 水精菴을 1393 년부터 중창한 내용과 관련하여 1404년에 작성된 것이다. 즉, 記文은 제목과 같이 오대산 전체가 아닌 오대산 중 西臺에 위치한 수정암의 중창 전말을 기록한 글이 다. 그리고 그 시기는 화재 이전의 고려 말 상황과 중창 이후라는 조선 초에 걸쳐 있다. 오대산과 관련된 여말선초의 기록이 전무한 상태라는 점에서 記文이 비록 수정암 과 관련된 제한된 자료이지만,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확보한다. 記文의 분석을 통해서 먼저 본고에서는 수정암의 신앙체계 변화와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를 통한 오대산 신앙체계의 변화 양상에 관해서도 나름의 이해를 피력해 보고자 하였다. 오대산의 신앙체계는 자장의 문수신앙에서 시작하여 寶川에 의한 오대신앙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記文은 오대신앙의 개별적인 특징이 고려 말에 유전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오대신앙 전체의 연계성 자체를 제고해 볼 수 있는 측면이 된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된다. 다음으로 본고는 한강의 시원 비정과 관련된 검토를 개진해 보게 된다. 한강의 시원은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한 이래로 중요한 의미를 확보한다. 그런 데 전통적인 한강의 시원으로 인식되는 곳은 오대산 서대의 우통수이며, 우통수라 는 명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바로 권근의 記文이다. 그런데 記文에는 우통수가 한강의 시원이라는 직접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한 우통수라는 명칭의 근원이 되는 『삼국유사』의 오대산 관련 기록들에는 우 통수라는 명칭과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명칭들만이 보이고 있어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정리는 우통수가 조선조를 일관하면서 한강의 시원으로 비정 되어 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본고를 통해서 우리는 우통수의 명칭적인 타당성과 자료상의 차이점에 대한 문제 점들을 해결해 볼 수가 있다. 이는 한강의 시원문제가 비단 조선의 문제만이 아니 라, 오늘날도 서울이 수도인 상황에서 현재로서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높은 연구의 의를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대산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성지이다. 그러므로 記文의 분석을 통한 오대산과 관련된 보다 폭넓은 연구접근의 시도는, 한국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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