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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顚 朴漢永의 《戒學約詮》과 歷史的 性格

  • 주제石顚 朴漢永의 《戒學約詮》과 歷史的 性格
  • 시대1912년
  • 저자X
목차
위로 가기 石顚 朴漢永의 《戒學約詮》과 歷史的 性格
Ⅰ. 撰述의 時代的 背景
Ⅱ. 《戒學約詮》의 內容
Ⅲ. 石顚의 《戒學約詮》과 계율사상
Ⅳ. 맺음말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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撰述時代的背景 漢(1870~1948)은 (愛號)가 김, 법명은 金, 호는 이며 漢은 속명이다. 全 山의 법통을 이은 白愛 明의 법을 계승하였다. 통칭 석전 한영으로 불리운다. 석전은 일 찍이 萬物事進月校金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전통이 임제종임을 밝히려는 區通에 심혈을 기울인 바 있다. 그 는 1912년  事學校에 투신한 이래 승려교육과 민족정신을 계도하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서 일제하 식민지시대에 불교계 대표적 인 교육자이며 대석학이다. 그는 1929년 60세에는 朝에 취 임하여 조선불교 최고 지도자로서 폭넓은 도량으로 종단을 이끌었으 며, 1931년 62세 때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故事門學校의 교장으 로 선임되어 도제양성에 온몸을 다 바쳐 불교중흥과 조국광복의 인재 양성에 몸바쳤다. 석전 한영은 근세기의 와 그리고 을 겸한 대표적인 고승으 로서 많은 저술과 글을 남기고 있는데 ≪ 學 ≫은 1926년 중앙 불전 교육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저서는 석 전의 ≪ 文 >·<正 ≫ 등에 비한다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계학약전≫은 일제하에서 '食'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 었을 때 저술된 것으로 그의 계율관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앞서 일제하의 '대처육 식'에 관하여 약간의 글이 발표된 일이 있었으나 《계학약전≫에 대 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계학약전≫의 내용과 그 역사적 의 의를 살핀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근대 한국불교의 故 觀이 전반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 래도 일본불교의 영향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일수호조약 이후 문호개방과 함께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불교는 정치·군사적 침략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종교 침략을 동시에 병행시켰 다. 당시 조선불교는 5백여 년 동안의 억불 정책 속에서 너무나도 쇠잔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일본불교는 한 국불교에 대해 여러 가지 은덕을 베풀면서 침투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劃出人物正의 악법을 폐하게 한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불교에 대한 반응은 처음부터 호의적인 면이 많았고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이 런 분위기에서 일본 불교의 계율관은 그대로 한국 교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체로 일본불교의 계율관은 우리 나라처럼 그렇게 엄격한 것은 아 니었으며 그들은 이미 헤이안조(平 朝, 794~1192) 때부터 강사들간에 의 풍조가 있었다. 다시 요시하라(平, 1160년 전후) 말기로 가면 이른바 食'을 공공연히 행하는 무리가 나타나고 또 정토 진종을 개창한 (1173~1252)이 취처한 이래 이러한 풍조는 더욱 널 리 퍼지게 되었다. 明治新 有에 이르러서 이른바 '의 법란을 겪은 뒤 명치 5년(1872)에는 '승려의 식육대처는 각자 임의에 맡긴다'라 는 조처가 내려짐으로써 그들의 계율관은 또 한번 변질되었다. 한국불교 계법에는 조선 계법의 중흥을 가져왔다고 평가하는 외에도 백파긍선(1767~1852)계·중국전래계 등의 삼계파가 있었으나 나중에 흡수 융합된다. 또 한편으로는 범어사 금강계단도 대은낭오선사 계파와 회광화상의 중국전래계가 서로 융화되어 다 같 이 참회법을 행하였다. 즉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성격이 수계법에도 나 타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융합될 수 있는 관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특색이었다. 조선의 계율은 전통적으로 소승의 《分 > 과 대승보살계의 을 중시해왔다. 특히 출가자의 ≪사분율 중시는 파(596~667) 山의 전통으로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어 왔 으며 대은선사가 부흥시킨 계법 등도 남산율종의 전통에 기초한 것이 다. 그런데 이러한 계율관이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근세의 개방정책과 더불어 불교계는 불교의 근대화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승려의 계율문제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대처와 육식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비구계 가운데에서도 불타가 엄 하게 금한 4바라이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處 '라 불리우며 가장 중시되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문호개방 이후 일본불교가 침투 하면서 정식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 제일 먼저 취처의 문제에 대해 일단의 견해를 피력한 사 람은 서대문 밖의 高라는 승려로서 그는 독신생활로 인한 인구감손을 우려한 나머지 승려의 有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체계적인 이론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만큼 최초의 발언자로는 萬 (1879~1944)을 들어야 할 것이다. 만 해는 ≪朝 新을 1910년 탈고하여 1913년 출판하였다.만 해는 이 저술을 통하여 진보적 관점에서 상호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소개하여 새롭게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불교계가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피력하였다. 그는 30세 초반에 의 주선으로 일 본에서 1908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반년 동안 머물면서 일본 불교계 의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일본불교계 순례는 크나큰 경각심을 일으켜 조선불교의 개혁운동을 서두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가 서 양의 자유 평등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인간의 자율성, 모험정신, 경쟁 정신 및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의 도입을 강조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수 용하여 불교라는 특정 분야에 합리적으로 적용한 것은 근대사상사에 서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조선불교유신 론> 14장의 〈불교의 앞날과 승려의 결혼과의 관계〉에서 파격적인 승 려의 취처문제를 다룸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1910년 3월과 9월 당시 는 의장인 숲과 통감 正 앞으 로 청원했던 것이다.이어 1919년 11월, 이번에는 용주사 주지 大進이 〈 康 高 > 를 제출하였는데, 그 골자는 대처행위를 장려시켜달라는 내용이었다. 즉 일본귀족의 딸과 한국 승려의 결혼이나 일본승려와 한국귀족의 딸 과의 결혼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한용운의 유신론은 국력과 교화 문제에 염두를 두면서 불교의 발전을 도모하려던 것이요, 강대련의 의 견서는 일본 불교와의 야합을 역설한 것이라는 차이를 두고 있지만 비구 韓 4바라이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불교계에 큰 충격이 아 닐 수 없었다. 이렇듯 승려의 계율문제 중에서 특히 취처에 관한 문제 는 파격적이고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불교계의 즉각적인 반응은 잘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白成은 1926년 당시 63 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26년 5월 生族에 대한 1차 를 127명 비구 명의로 총독부에 제출하고, 그 해 9월 2차 지계 건백서 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강력히 그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일 본불교의 취처 육식의 풍토가 은연중 한국불교에 스며들고 있었고 이 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됨에 따른 우려와 각성이었다. 그런데 석전은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자신이 몸담고 있 던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청년승려들의 교육과 의식개혁에 초점을 맞추 었다. 즉 중앙불전의 계율학 교재를 직접 만들어 승리의 故事康의 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왜색 불교화되어가는 한국 불 교에 대한 엄중한 꾸지람이었으며 그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와 같은 조처는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발단이 되어 비구대처간 정화운동의 빌미가 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선각자적인 통찰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계학약전이 역사적으로 민 족 자존심과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려했다는 노력의 산물로서 볼 때 그 의의를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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