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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臺山史庫의 立地와 四溟堂
- 주제五臺山史庫의 立地와 四溟堂
- 시대2006년
- 저자염중섭
목차
위로 가기 五臺山史庫의 立地와 四溟堂염중섭
Ⅰ. 序論
Ⅱ. 오대산 明堂 인식과 靈感菴
1. 오대산 명당 인식의 유래
2. 오대산 佛敎聖山 인식과 寶宮
3. 오대산 靈感菴의 역사적 위치
Ⅲ. 오대산사고의 입지 선정과 사명당
1. 外史庫의 변화와 守直寺刹
2. 오대산사고의 입지와 사명당의 영향
3. 오대산사고와 입지와 명당 인식
Ⅳ. 結論
상세소개
위로 가기五臺山史庫本 실록과 의궤는, 월정사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재환수위의 노력에 의해 각 각 2006년과 2011에 국내로 되돌아온다. 이 공로로 2012년 12월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이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 등 관련자 5명에 대한 훈장수여가 있었다. 이와 같은 영향으로 오대 산사고와 오대산본 실록에 대한 관점이 환기되면서 2006년부터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된다. 본고는 오대산사고가 왜 오대산에 입지하게 되는지에 관해서 논구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는 조영록의 「五臺山史庫의 設置와 四溟大師」라는 직접적인 선행연구가 있다. 조영록의 논문 은 ‘사명당과 오대산과의 깊은 인연’과, ‘사명당의 왜란에서의 역할에 따른 사고설치’를 중점 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사명당의 역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대산이 사고로서의 입지배 경을 갖추지 못했다면, 사고와 같은 국가적인 중요시설이 들어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연구에는 아쉬움이 있다. 본고는 오대산이 名山이며 吉地(明堂)라는 측면을 바탕으로, 사고 설치와 관련된 사명당의 영향에 대해서 고찰해 본 것이다. 즉 조영록이 사명당의 영향을 중심 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본고는 오대산의 길지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해서 사명당의 영향을 고찰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왜란으로 드러난 城內 사고의 취약성에 대한 해법으로 대두된 것이, ‘명산의 봉안’과 ‘관리 자로서 사찰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오대산사고의 설치에는 사명당의 영향과 함께 오대산 이라는 입지배경에 대한 검토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이러한 양자 를 고르게 살펴서, 사고가 왜 오대산으로 정해지게 되는지에 대하여 보다 명확한 접근을 시도 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제Ⅱ장에서는, 오대산의 ‘터와 관련된 吉地’와 ‘불교성지로서의 聖山’이라 는 개념에 대해서 정리하였다. 이는 오대산이 조선의 인식에 있어서도 명산이라는 관점을 주 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며, 사고설치와 관련해서 허용의 전제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측면들을 바탕으로, 오대산사고가 들어서게 되는 靈鑑蘭若에 대한 특징과 변천에 관해서 정리하였다. 이는 오대산사고가 왜 영감난야에 들어서게 되는지에 대한 배경이해와 심 화를 촉진시키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제Ⅲ장에서는, 오대산사고가 설치되는데 있어서 사명당 역할의 개연성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왜 영감난야에 오대산사고가 들어서야 하는지에 대하여 명 당론의 관점에서 정리하였다. 이러한 연구접근을 통해서, 사고가 왜 오대산에 들어서게 되는지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인식 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터를 중심으로 하는 이해는 다른 外史庫의 입지조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본고는 충분한 연구의 타당성을 확보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