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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學兼修와 禪敎融會의 漢巖思想
- 주제三學兼修와 禪敎融會의 漢巖思想
- 시대현대시대
- 저자혜 거
상세소개
위로 가기해저물녘 가던 길 멈추고 포은선생 비석 찾아뵈니 절개 높은 대장부 목숨 바칠 시대였네 임금도 나라도 없는 우리들 세상에 산다는 게 슬프지 아니하랴 斜陽停杖弔忠碑 高節男兒死節時 無君無國如吾輩 生長人間何不悲
위의 시는 漢巖(1876~1951)이 개성 등지를 행각하던 중 포은선생의비석을 찾아 지은 <弔圃隱碑>이다. 고려 말의 망국을 보면서 순절한포은의 비석을 찾아 그의 심정을 토로한 시로써 조선의 망국에 즈음하여그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를 은연중 내포하고 있는 綿中有鐵의 기개에 찬 詩想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를 음미하면 당시현실에 대한 한암의 인식과 그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할 수있으리라고 본다. 한암이 생존했던 당시는 왜정의 식민통치, 대한민국 정부의 건국,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화로 이어지는 갈등과 대립의 세월 속에서 그 어느하루도 태평연월을 찾아볼 수 없었던 혼란기였다. 특히 당시 한국불교종단은 밖으로는 왜정식민정책하의 呑倂을 위한 俗化運動으로 한국불교의자주성은 거의 상실한 상태였고, 안으로는 대다수 승려들이 출가의 본분을망각하고 왜정에 대한 阿諛苟容과 趨勢濟慾의 작태로써 한국불교의 末世的 兆朕이 역력한 目不忍見의 慘狀이었다. 이처럼 나라를 잃음으로써 사람조차 잃게 되고 따라서 불법조차 모두잃어버린 人法俱亡의 암흑기에 한암은 어떤 행적으로 난세를 극복하고 국권을 회복하며 불법을 되찾으려고 했을까. 戒定慧 三學은 出家沙門의본분으로서의 수행덕목이며, 참선과 교학은 부처님의 언어와 心法으로써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기에 그 어느 것 하나버릴 수 없는 要諦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수행에 대한 筌蹄이자 悟道를향한 津筏로써 동시에 후학을 계도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허와한암은 師資相承하여 혼란의 동시대를 살면서 항상 현실과의 괴리와知己의 不在로써 일생동안 절름거리는 고뇌의 찬 생애를 살았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한암은 경허의 인가를 받은 법제자로써 三學과 禪敎의 문제에대해 경허와 禪脈과 사상이 같다 하겠거니와 그러면서도 각자의 개성과이념의 差로써 이에 대한 행적의 軌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련의 同異点이 근대불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고찰함으로써 昨今의 불교 내부에 존재하는 현안문제와 미래불교의 지향점에 溫故知新의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입장에서 이 논문을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