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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漢巖의 一鉢禪

  • 주제한암사상 제2집
  • 시대현대시대
  • 저자高 榮 燮
목차
위로 가기 漢巖의 一鉢禪
胸襟(藏蹤)과 把拽(巧語)의 응축과 확산
高 榮 燮
Ⅰ. 문제와 구상
1. ‘반고씨 이전’과 ‘참다운 성품’ 2. 천고의 학과 삼춘의 앵무새
Ⅱ. 율사와 선사의 살림살이
1. 質直한 성품과 高明한 학문
2. 유장한 선풍과 활달한 교풍
3. 守拙의 살림살이
Ⅲ. 일발선풍의 지형도
1. 一鉢의 함의
2. 물러나는(藏蹤) 참여
3. 나아가는(巧語) 침묵
4. 胸襟과 把拽의 활구
Ⅳ. 정리와 맺음
1. 법화와 행리의 응축
2. 장종과 교어의 확산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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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중원(漢巖 重遠, 1876~1951)은 조선 말기와 대한 초기(1897~ )의 전환기에 출가하여 치열한 수행력을 바탕으로 대한불교의 자존을 지킨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서당에 다니던 어린시절부터 세계의 근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투철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지 않아 애매하고 모호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근원’ 또는 ‘궁극’에 대한 중원의 문제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출가하기까지 내면 속에 잠복해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한암이 출가할 즈음 세계 열강들은 제국의 영향력 확대와 상품의 판매력 확장을 위해 조선의 항구들을 넘나들기 시작하였다. 특히일본은 강화도 앞바다에서 수심을 조사한다며 접근하였고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강제로 문호개방을 당하기에이르렀다. 이 시기 조선 정부는 승려들의 도성출입금령 폐지안에대해 몇몇 차례 논의를 거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갑오경장과 동학혁명 및 갑신정변을 거치고 나서도 아직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본 일련종의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요청을 계기로 도성출입 해금령(1895; 1897)이 반포되었다. 용주사의 석상순(釋尙順, 崔就墟) 등 일부 승려들은 종교침략의 술책인 줄 모르고 일황의 만수무강과 일본 승려에 대한 감사까지 보임으로써 조선 승려로서의 자존심을 내팽개칠 정도의 추태를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그 동안 조선 승려들에게 도성출입금령의 해제가 얼마나 큰열망이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희유한 일이지만 한암의 스승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6~19123)) 는 일찍이 일부 조선 승려들의 비굴한 모습과 달리 ‘나에게는 서원이 있으니 족히 경성의 땅을 밟지 않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조선불교의 자존을 토해내었다. 젊은 비구 중원은 도성출입 해금 이후경허에 의해 해인사 등지에서 본격적인 수선결사가 시작(1899)되는불교계의 개벽 시기에 처음으로 개오(開悟)를 얻게 되었다. 이즈음 불교계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먼저정부는 사찰과 승도들을 관리하고자 소흥사(紹興寺) 터에 원흥사(元興寺)를 지었다(1899). 뒤이어 정부는 대한사찰령을 공포(1902.4)한 뒤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에 의거하여 원흥사에 사사관리서를 두었다(1902). 이로 인해 대한불교는 다시 정부의 간섭 속으로 편입되어가고 있었다. 광무 정부는 원흥사를 대법산(大法山) 국내수사찰이라 일컫고 전국의 16개 사찰을 중법산(中法山) 도내수사찰로 삼아 불교계를 관리하였다. 하지만 사사관리서와 대법산제는 2년만에 모두 폐지되었다. 뒤이어 봉원사의 이보담(李寶潭)과 화계사의 홍월초(洪月初) 등은원흥사에다 정토를 종지로 한 불교연구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원흥사 경내에 명진학교(1906)를 건립하고 원종(圓宗)이라는 새로운 종단을 창종(1908)하였다. 동시에 중앙 교육기관으로서 명진학교를 세우고 각 지역 사찰에는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각종학교를 설치하기시작하였다. 때마침 원종 종무원 대종정이었던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의 다케다 한지(武田範之)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조동종 관장 이시가와(石川素童)와 함께 연합(합병) 조약을 체결하였다(1910.10). 이에한용운과 진진응 등은 격분하여 매종된 원종에 맞서 범어사에서임제종을 창종(1910.10.5 광주; 1911.1.15 부산)하였다. 북쪽의 원종과남쪽의 임제종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길항하였지만 불교를 교두보로 한 일본의 종교침략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결국 나라를잃게 되면서부터 그리고 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1911)하면부터 대한불교계는 주체적인 의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남쪽의 불교계는 총독부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 혼미를 거듭하였고 원종을 기반으로 한 북쪽의 불교계는 서서히 친일의 분위기로 기울어 갔다. 결국 북쪽을 기반으로 하는 원종과 남쪽을 기반으로 하는 임제종은 총독부와의 친소 관계 설정에 있어서 그 입장이달랐으나 두 종단 모두 총독부 치하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조선총독부 아래에 이름뿐인 30본산 회의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30본산 주지들이 회합하여 다시 30본산에 연합사무소를 두었다(1915). 하지만 본사주지가 종래의 공의적인 사원운영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운영을 전횡하였다. 일본 유학승과 젊은 승려들 및 서너 개의 본말사 주지들이 들고 일어나 조선불교 선교 양종 중앙총무원을 각황사(태고사, 조계사)에 설치하였다(1922.1) 이와 달리 나머지 본말사 주지들 역시 각황사에다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설치하였다(1922.5). 이들 두 종단은 약 2년간 대립하다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가까스로 통합되었다. 조선 말 대한 초기에출가를 단행했던 한암 중원이 불교계의 대표적 수행자로 이름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6) 역시 바로 이때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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