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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巖의 宗祖觀과 道義國師

  • 주제한암사상 제3집
  • 시대근현대
  • 저자金 光 植
목차
위로 가기 漢巖의 宗祖觀과 道義國師
金 光 植
Ⅰ. 서언
Ⅱ. 1910~1920년대 종조문제의 인식
Ⅲ. 한암의 종조관 피력
Ⅳ. 결어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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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불교(1920~1950년대)에서 한암은 교정 및 종정을 네차례나 역임한 고승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불교계에서의 한암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암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다. 최근 한암의 근거 사찰이었던 월정사에서 한암사상연구원을 설립하여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세미나에서 발표된 연구 성과물을 모아 한암사상을 발간했지만, 아직도 일부 연구자들만이 한암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정도이다. 그래서 한암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절실한 실정이다. 이에 본고는 이 같은 배경에서 집필되었거니와, 본 고찰에서는한암이 불교 70호(1930.4)에 기고한 글인 「海東初祖에 對하야」에나타난 宗祖觀을 살피려고 한다. 필자가 한암의 이 기고문을 분석하려는 연유는 다음과 같은 사정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 첫째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가 道義國師라는 관점에서 한암이 도의에 대해 쓴 글을 주목한 결과이다. 즉, 근현대 한국불교에서 도의국사를 종조로 내세워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인물이바로 한암이었다. 도의국사가 한국불교 교단차원에서 종조로 내세워진 것은 1954년이었으며, 그 이후 불교정화운동의 발발, 비구승단의재정립이라는 불교사 전개에 즈음하여 도의는 확고부동한 종조의위상을 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이 같은 역사적 전개를유의하면서 한암은 왜? 어떤 연유로 도의국사를 종조로 세워야 한다는주장을 했는가에 대한 의아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본 고찰에서그 전후사정을 밝혀보려고 한다. 다음 두 번째로는 한암이 도의국사를 내세워야 한다는 기고문을작성한 것은 지금껏 선사, 선승, 도인, 선지식, 율사, 종정 등으로불렸던 한암의 호칭 및 이미지와는 전연 이질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즉한암의 이미지는 은둔적인 고승이었다. 오대산에 입산, 수행한 27년간 산문을 나선 것은 단 세 차례였다는 저간의 풍문은 그를 예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교정, 종정을 역임하면서도 종단 및 총무원이 있는 서울, 조계사에 한 번도 나오지를 않았다. 이렇듯 은둔적수행을 하면서 세속과 단절했던 그가 종조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했음은 기이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것이다. 또한 종정을 역임한 고승 중에서 종조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논설로 기고한 경우가 희박한 저간의 풍토를고려할 경우에도 한암의 행적은 시선을 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필자는 두 가지 연유에 의거하여 한암의 종조관을 분석하려고 한다. 필자는 이에 대한 관심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지만 연구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이 분야에 대한 연구 성과도가시화되고 있음을 고려하면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여기고, 본고를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필자의 이 고찰로 근현대 종조문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혀지고, 나아가서는 한암 연구의 지평이확대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미진한 측면은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할 예정이거니와 강호제현의 질정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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