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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 정호와 중앙불교전문학교

  • 주제석전과 한암,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말하다
  • 시대현대시대
  • 저자고영섭 _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목차
위로 가기 영호 정호와 중앙불교전문학교
- 한국의 ‘윌리엄스 칼리지’ 혹은 ‘엠허스트 칼리지’
고영섭 _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Ⅰ. 문제와 구상
Ⅱ. 영호 정호의 살림살이
Ⅲ. 개운사와 대원암의 불교전문강원 개원과 불전
Ⅳ.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승격과 학풍
Ⅴ. 영호 정호의 사고방식
Ⅵ. 정리와 맺음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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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사학인 동국대학교1906~2014 • 1의 전신 중앙불교전문학 교1930~1940는 한국 인문학의 본산이었다. 중앙불전은 원흥사의 명진 학교-불교사범학교-불교고등강숙에 이어 옛 북궐 왕묘가 있던 숭 일동혜화동 1번지에 자리했던 불교중앙학림과 이를 계승한 태고사조 계사 전신 총무원의 불교학원을 계승한 불교전수학교에서 승격한 문과 중심의 단과대학이었다. 당시 중앙불전은 오늘날 대학평가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들로 평가받는 하버드-예일-프린스턴 대학을 제치거나 필적하는 미국의 북동부 메사추세츠주에 자리한 작은 대학인 윌리엄 스 칼리지Williams College, 1793~ • 2와 엠허스트 칼리지Amherst College, 1812~3에 상응하는 학부대학• 4이었다. 당시부터 불교계의 중앙불전은 기독교계의 연희전문과 천도교계 의 보성전문과 함께 한국의 3대 사학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후 혜화 전문학교로 거쳐 동국대학-동국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 중앙 불전의 다섯 명의 교장 중 가장 오랫동안 재직하였던 영호당 정호映 湖堂 鼎鎬, 1870~1948, 즉 석전• 5 한영石顚 漢永은 불도유佛道儒의 삼교三敎와 선교율禪敎律의 삼학三學 및 공유空有의 교학과 이사理事의 종학에 막힘 이 없었던 석학이었다. 그는 불교중앙학림의 학장을 역임한 이래 이 대학의 교장과 교수로서 오랫동안 재직하며 중전학풍을 주도하였다.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의 교육역사에서 새로운 교육제도의 도입 과 정착은 일제의 지속적인 고등교육 저지 획책과 탄압에 맞물려 저 항과 확충의 노력을 요청받았다. 때문에 당시 국내 대학들은 일본의 식민지 고등교육정책 아래에서 근대 고등교육기관의 위상을 유지하 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달리 국내 기독교계는 선교회와 기독교 독지가들의 경제적 원조에 힘입어 재정적 기반을 확충한 세브란스연합 의학전문학교1917, 연희전문학교1917, 숭실전문학교1925, 이화여전1925 등을 유지해 왔다. 또 천도교는 보성전문학교1922를 운영하였다. 반 면 불교계는 명진학교1906로부터 불교전수학교1928에 이르기까지 갖 은 차별과 반대를 물리치고 뒤늦게 중앙불교전문학교1930로 승격 인 가를 받아 관학官學의 경성제대1926에 대응하는 사학私學의 ‘전문학교’ 대열에 합류하였다. 일찍이 영호 정호는 장성 백양사 운문암의 환응 탄영歡應 坦泳, 1847~1929 • 6에게서 사교四敎를 배웠다. 이어 그는 순천 선암사의 경운 원기擎雲 元奇, 1852~1936• 7에게서 대교大敎를 수학하였다. 그 뒤 영호는 순창 구암사의 설유 처명雪乳 處明, 1858~1903 • 8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 다. 지방에서 강론을 하던 그는 39세에 유신維新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불교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영호는 중앙학림이 휴교하 자 총무원의 불교학원과는 별도로 개운사開運寺와 대원암大圓庵에서 불 교전문강원1926~1945을 열어 수많은 선승 학승들과 재가선생들에게 불교학과 동양문학의 본질을 머금고 있는 인문학 전반에 대해 강론 하였다.• 9 그 때문에 그가 머물던 대원암에는 사계의 대표적인 인물 들이 모여 인문학, 동양학, 한국학 연구를 위한 열린 대학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형성된 ‘석전학통石顚學統’ • 10은 영호 정호의 ‘박학博學’ 과 ‘통재通才’에서 기원한 것이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시원은 대한 불교의 유신을 위해 교육에 집중해 온 그의 간절한 원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영호가 심혈을 기울여 온 교육에 대한 원력과 열정은 백양사 광 성의숙廣成義塾 숙장을 역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교육은 불교계의 중심 교육기관인 명진학교• 11-불교사범학교를 이은 불교고등강숙이 개설되면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영호는 명진학교 강사로부터 30본산 주지회의원 안에 설립한 불교고등강숙의 숙사塾師, 숙장(塾長)에 이어 불 교중앙학림• 12의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중앙학림 휴교 이후 총무원 의 불교학원1922~1928을 거쳐 복원된 불교전수학교가 중앙불교전문학 교로 승격되자 그는 제4대 교장을 도맡아 학풍 수립에 남다른 정열 을 쏟아 부었다. 이후 영호는 중전의 교장과 혜화전문학교1940~1946 의 명예교수를 사임한 뒤에는 구암사와 내장사로 내려가 만년을 보 냈다. 이 글에서는 영호 정호의 행장• 13과 논저들• 14 및 그에 대한 선 행 연구• 15를 검토하면서 그의 수학과정과 교육 이념 및 그가 교장으 로 재직한 중앙불교전문학교 시절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살펴보 고자 한다. 아울러 그가 모색했던 불교교육자로서의 정체성과 학승 으로서의 인식틀에 대해 탐구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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