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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漢巖)의 출가 과정과 구도적 출가관

  • 주제출가문제에 대한 종합적 고찰 -출가절벽 시대의 한국불교, 반전의 돌파구는 없는가?-
  • 시대19세기
  • 저자이원석(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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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석(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
목차
Ⅰ. 머리말
Ⅱ. 출가의 과정과 문제의식
Ⅲ. 출가 시기에 대한 검토
Ⅳ. 출가자의 求道眞覺과 世俗觀
Ⅴ. 맺음말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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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불교는 俗世와 出世를 구분하고 此岸과 彼岸을 경계로 삼 아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출세간을 전범으로 삼고 피안을 이상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불도를 이루기 위한 출가는 기본적인 수행의 자세로 강조된 반면에 속세나 그 인연은 修道의 방해물로 인식되었고, 스님이 환속하거나 결혼하는 것은 불도를 어기거나 계율을 깨뜨리는 것으로 이해 되어 배척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도하는 무렵에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것은 큰스님의 요건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고향 속가의 부모님 에게 절하는 것조차 경책의 대상이었다. 또한, 숭유억불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조선시대의 승려는 대체로 사회적으로 무시되거나 차별받는 존재였다. 승려에게 출가 이전의 생활은 대체로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되었고, 출가란 피난과 피병, 부모의 죽음 등과 같이 부득이하여 결행되 거나 동진출가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예컨대, 한국 근대의 불교, 특히 참선을 중흥한 것으로 평가된 鏡虛는 9세에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따 라 廣州 淸溪寺의 桂虛에게 출가하였다. 게다가 鏡虛 이래로 不立文 字와 見性成佛을 강조한 禪家는 普門이 보여주듯이 참선 이외에 간경마 저 달갑게 여기지 않고 著述을 배격하였다. 이에 따라 승려에게 세속 의 행적은 달리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고, 문자와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경시되었다. 게다가 출가의 연구는 역사적 사실과 신앙이나 종교와도 결부되는 문 제가 있다. 근현대의 위대한 고승의 경우,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미미한 출가 자료도 종교적 성격으로 윤색되고 신격화되었다. 宋滿空과 申慧月 의 동진출가에서 ‘불교적 인연’을 강조하는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宋滿 空은 불교적 宿緣과 ‘長壽의 인연’을 맺기 위해 13세에 김제의 금산사 에서 過歲한 발걸음이 출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고, 申慧月도 찢어 지게 가난했던 속가의 사정과 宿世의 佛緣으로 12세에 모친을 따라 덕 숭산 定慧寺의 慧安에게 출가하였다. 모친의 사망과 계모와의 불화를 배경으로 14세와 16세, 두 차례나 출가한 白龍城의 경우는 그나마 사 정이 보다 낫다. 그의 출가는 자비로운 성품과 함께 꿈속에서 부처님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손바닥에 ‘咡’자를 써주면서 佛陀祖師의 正法安藏을 부촉한 이른바 ‘夢中摩頂佛手記’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韓龍雲의 경우 는 불교적 요소의 윤색으로 인하여 출가와 관련된 이설이 많지만 불교 적 친연성보다 현세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지향성과 관련지우는 주장도 있다. 이상에서 출가의 문제의식을 찾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조선 말기 승려의 출가는 사실적 기록으로 전승되는 경우보 다 신화적으로 구전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출가 관련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소수이고, 출가의 문제의식도 명확하지 않다. 물론 이들의 출가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불어 닥친, 상상을 초월하는 사 회적 격동도 그 배경으로 일조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불교계의 요구와 관 련되어 신앙과 종교라는 요소가 가미되거나 윤색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말기 불교계에는 출가의 실상과 문제의식도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구도적 문제의식의 심화나 발심이 출가 이후에 본격화된 것 은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본고는 출가의 동기와 문제의식이 비교적 뚜렷하다고 일컬어지는 漢巖 (1876-1951)의 출가 과정과 문제의식, 출가시기와 出家觀을 고찰하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참선을 중시한 선승이었던 한암도 저술과 기록에 유 의하지 않았고, 원본 漢巖一鉢錄마저도 1947년 상원사 화재로 모두 소 실되었다. 또한, 출가와 관련된 한암의 기록은 거의 없고, 탄허 등 제3자 의 단편적인 서술이나 회고가 있을 뿐이다. 필자는, 2010년에 남아 있는 문편을 수습하여 출간한 定本 漢巖一鉢錄 등을 중심으로 한암의 출가 과정을 재구성하고 ‘盤古 이전의 면목’이라는 출가의 문제의식을 고찰하 겠다. 이어 한암의 「연보」에 정리된 1897년 ‘22세출가설’을 비판하고 1894년 ‘19세출가설’을 주장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한암이 1926년 오 대산 상원사로 이거한 이후, 출가하려는 제자나 납자에게 일반적으로 수 행하는 과정에서 세속과의 인연을 엄격하게 경계하면서도 求道眞覺을 인 도할 적에는 일상생활이나 심지어 세속에서의 得力마저 강조하는 世俗觀 을 살피고자 한다. 이상을 통하여 한암의 출가와 관련하여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신앙의 간극이나 세속과 출세간의 사이를 음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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