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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대산의 발전과 오대산문수신앙

  • 주제한국 오대산의 불교문화와 문수신앙
  • 시대3세기
  • 저자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원 _ 곽뢰
목차
위로 가기 중국 오대산의 발전과 오대산문수신앙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원 _ 곽뢰
Ⅰ. 머리말
Ⅱ. 북조시기의 오대산과 문수신앙
Ⅲ. 수말당초의 오대산과 문수신앙
Ⅳ. 화엄학의 흥기와 오대산문수신앙의 성립
Ⅴ. 맺음말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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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숭배는 고대인의 신앙 형태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산악숭배신앙은 대승불교의 불보살 신앙을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불교적 성산(聖山)신앙, 즉 성산보살신앙으로 변용되기도 하였다. 이 불교적 성산신앙의 출현은 한역(漢譯)불교 권역의 특별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그 과정이 당시의 정치⋅사회와의 긴밀한 관계 하에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산신앙의 성립과 전개 양상은 중국불교의 전파와 발전 과정의 특수한 현상으로 보이며, 한역 대승불교 사상권역에 속하는 한국과 일본의 불교 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화엄경 「보살주처품」에는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 문수보살의 주처 청량산은 중국의 오대산으로 인식되었다. 중국 오대산은 산서(山西) 북부에 위치한 산으로 고대의 정치⋅사회 발전의 중심이었는데 이는 북조시대에 북방의 주요 도시로 성장한 것과 연관되어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살펴보면 오대산 성산신앙의 발전은 실로 정치적 관계와의 영향이 심대하다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북조시기에 다져진 기초가 이후 군주들이 이곳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도량으로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문헌들을 고찰해 보면 오대산의 발전과 문수신앙의 관계는 선인들이 논했던 것처럼 그렇게 긴밀하지는 않다. 기존연구에서 문수신앙과 관련한 용어에 대해서 다소의 혼동이 있다. 즉, '문수신앙'과 '오대산문수신앙'은 용어상 혼동의 여지가 있어서, 두 신앙은 구분하여 보는 것이 타당하고 판단된다. '문수신앙'은 일찍이 후한시기 문수에 대한 경전이 번역됨에 따라 발전되었던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의거한 신앙이다. 한편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대산신앙’은 ‘오대산문수신앙’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오대산에 상주한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으로, 당 시기에 와서 문수보살의 주처인 청량산을 중국의 대주(代州) 오대산으로 비정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즉, 오대산문수신앙은 이 청량산이 중국 오대산으로 해석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결국 두 신앙은 그 성립시기와 사상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축법호(竺法護)는 진(晉) 太始 2년(266)부터 수진천자경을 번역하여 영가 2년(308)에 보요경을 번역할 때까지, 약 43년 동안 번역 사업에 전념하였다. 축법호는 문수보살에 관련된 경전을 가장 많이 번역하였고 총 25부가 있다. 한편 문수 관련 경전의 번역 시기는 축법호를 기준으로 축법호까지의 시기를 전기로 하고, 축법호 이후부터 3세기까지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문수보살과 관련된 경전들이 중국의 문수신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과 중국학계의 연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이를 바탕으로 중국 오대산문수신앙의 성립과정 중의 몇 가지 문제점을 다시 검토하려고 한다. 먼저 북조시기의 오대산과 문수신앙에 대해서 정리하고자 한다. 이어 당대에 와서 화엄경 가운데 청량산이 어떻게 중국의 오대산으로 비정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의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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