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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수륙재의 역사와 상원사의 국행수륙재 설행
- 주제한국불교에서의 제석천이 가지는 의미와 제석신앙
- 시대건국 후 150여 년이 지난
- 저자이종수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목차
위로 가기 조선 전기 수륙재의 역사와상원사의 국행수륙재 설행
이종수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1. 머리말
2. 조선 전기 국행수륙재의 설행과 폐지
3. 상원사의 위상과 국행수륙재 설행
4. 상원사 국행수륙재 설행의 이유
5. 맺음말
상세소개
위로 가기조선 건국 후 불교의 위상이 고려와 달라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건국의 주도 세력인 성리학자들은 권력의 정점에 있던 불교계를 개혁하여 자신들의 하위에 두고자 했다. 정도전 같은 몇몇 성리학자들은 불교 교리가 성리학에 비해 하등하며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성리학자들의 권력구조 개편 정책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졌고, 건국 후 150여 년이 지난 후 중앙 권력에서 불교의 권력은 완전히 박탈되었다. 그러나 불교 신앙은 왕실을 중심으로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불교 신앙을 언급할 때 함께 논의되는 것이 불교 의례이다. 고려시대 국가 의례의 기본 틀은 유교와 불교적 의례로 이루어져 있었다.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의 오례(五禮)는 유교적 의례이고, 팔관회·연등회·수륙재·반승법회 등은 불교적 의례이다. 고려에서도 유교적 의례가 정착되어 있었으나, 죽음이나 기복과 관련되는 의례는 불교 의례를 설행하였던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기복을 위한 불교 의례는 대체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지속되었다. 신하들은 불교 의례를 비판하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으므로 강력하게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중종·명종 대를 거치면서 궁궐에서 행하던 불교 의례가 지방의 왕실 원당으로 이관되었다. 즉 궁궐의 불교 의례는 대부분 혁파되었지만 왕실 원당에서 그 의례가 지속되었으므로 왕실의 불교 신앙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불교 의례 가운데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이다. 민간이 아니라 정부에서 설행하였다는 의미에서 ‘국행’이라는 글자가 덧붙여졌다. 수륙재는 천지명양수륙재(天地冥陽水陸齋)의 줄임말로서, 하늘과 땅 어둡고 밝은 곳의 물과 육지에 있는 중생을 위한 재(齋)라는 의미다. 수륙재라는 표현은 실록에도 자주 등장하며 그 대표적인 것이 고려 왕족인 왕씨의 천도를 위한 의례이다. 고려 왕씨를 위한 수륙재는 삼화사·관음굴·현암사에서 설행되었는데, 삼척 삼화사의 수륙재가 오대산 상원사로 이전되었다. 그런데 필자가 상원사와 관련한 논고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상원사의 문화재와 관련한 글들이었고, 수륙재를 중심으로 언급한 글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자료가 부족하여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조선 전기 설행되었던 국행수륙재의 설행과 폐지를 살펴보고, 오대산 상원사의 수륙재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국행수륙재를 설행한 상원사의 위상에 대해서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