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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의 오대산 주석과 의미
- 주제한국 고 중세 오대산의 고승과 역사
- 시대1357년
- 저자이철헌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목차
위로 가기 나옹의 오대산 주석과 의미이철헌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Ⅰ. 시작하는 글
Ⅱ. 오대산 주석의 배경
1. 사굴산문의 성지
2. 오대산의 오만진신 신앙
Ⅲ. 오대산 주석의 의미
1. 사굴산문의 계승
2. 오대산의 중흥
Ⅳ. 혜근 제자들의 오대산 중창
1. 나옹의 고운암 창건
2. 영로암의 상원사 중창
3. 지선의 동대 관음암 중창
4. 각겸의 서대 염불암 중창
5. 운설악의 중대 사자암 중창
6. 신미
상세소개
위로 가기자장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그대 나라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일만의 문수보살이 언제나 머물러 있으니 가서 뵙도록 하라.”는 말을 듣고,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에 띠를 엮었고, 문수보살에게 받은 부처님 사리를 모셨다. 따라서 한국 오대산은 중국 오대산과 연결되는 문수보살의 성지이다. 그리고 신라 보천‧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 오대의 불보살에게 참배하면서 오대에 각 1만의 불보살이 상주하는 성산(聖山)이 되었다. 통일신라말에는 사굴산문을 개창한 범일국사와 그 제자들이 머물면서 사굴산문의 주요 사찰이 되었다. 고려말 나옹은 출가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의 문하에서 10년간 수학하고 인가를 받았으며 임제종의 고승인 평산처림에게도 인가를 받고 1357년(공민왕 7) 에 귀국한다. 나옹은 지공에게 인가를 받았다는 배경과 원의 대도(大都)에서 황제인 혜종(재위 1333-1368)의 명으로 광제선사에서 개당을 하여 명망을 얻었다. 그럼에도 요양(遼陽)에서 돌아와 곧장 개경으로 가지 않고 평양과 동해 등지를 돌아다닌다. 그러다 2년 뒤인 1360년 사굴산문의 주요 사찰인 오대산에 들어가 북대의 고운암에 머문다. 이곳에서 고운암 아래에 위치한 신성암에 있던 환암혼수를 만나 법을 전한다. 1361년 가을에 공민왕의 부름으로 궁중에 들어가 설법하고 공민왕의 요청으로 여러 절에 주지하다가 1369년 병을 핑계로 오대산으로 돌아왔다. 오대산을 떠난 지 8년 만에 다시 오대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대산은 혜근에게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혜근은 북대 고운암과 동대 관음암과 영감암에 머물렀고, 서대 염불암과 중대 상원사에도 흔적을 남겼다. 혜근의 제자인 설악(雪嶽)‧지선(志先)‧영로암(英露菴)‧목암(牧菴) 등이 오대산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창했다. 고려말 혜근과 제자들이 머물면서 오대산은 사굴산문의 주요 사찰이 되었고, 조선초기 혜근의 제자들이 오대산 암자들을 중창하면서 오대산은 불교 성지로서 중흥하게 된다. 나옹이 오대산에 주석한 배경과 의미, 그리고 나옹 문도의 오대산 불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