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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신화의 제석천과 불교의 제석천 수용

  • 주제한국불교에서의 제석천이 가지는 의미와 제석신앙
  • 시대기원전 14세기
  • 저자심재관 (상지대학교 FIND칼리지학부 조교수)
목차
위로 가기 인도신화의 제석천과 불교의 제석천 수용
심재관
(상지대학교 FIND칼리지학부 조교수)
1. 천신 인드라Indra의 출현
2. 인드라의 속성: 주색잡기에 능한 비겁한 신들의 왕
3. 불교의 인드라 수용과 신위(神位)의 재배치: 샤끄라쁘라슈나Śakrapraśṇa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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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신 인드라Indra의 출현 특이하게도 인드라가 인류 역사적 기록 속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대략 기원전 14 세기경, 그것도 인도와 멀리 떨어진 지금의 터키 시골 마을 보아스칼레(Boğazkale) 지역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발굴된 히타이트(Hittite)와 미타니(Mitanni) 왕국 사이의 협정 문서(정확히는 설형문자로 기록한 토판) 속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인도- 아리아 신들의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베다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신들이다. 언어학적으로 리그베다도 그 협정 문서가 제작된 유사한 시기에 구전(口傳)집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어도, 리그베다가 ‘기록된’ 시기는 비교적 현대이기 때문에 이 토판의 기록은 아마도 가장 오래된 인드라 기록의 흔적이 될 것이다. 한국과도 떨어질 수 없는 제석천의 이름이 터키에서 발견된 것은 고대 인도-이란인들의 조상 일부가 다른 쪽으로 서진(西進)했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이 신의 기원이 훨씬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반면 동남하(東南下)한 아리아인들은 리그베다(ṛgveda)나 아베스타(avesta) 안에 제석천의 흔적을 또렷이 남겼다. 특히 인도-아리아인들은 리그베다 속에 가장 다양하고 박력있게 제석천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 어떤 신의 모습보다도 가장 많이 그의 무용담을 찬양하고 있다. 천둥과 벼락의 신이며 비의 신인 인드라는 물을 가두고 있던 적 브리뜨라(vṛtra)을 무찌르고 세상을 해갈시킨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벼락(바즈라 vajra)를 휘두르는 이런 전투자의 모습은 제우스나 토르 등과 같은 인도-유럽의 다른 신들을 떠올리게 한다. 초기 베다 문헌 속에서 인드라는 무엇보다 전투의 신이며 동시에 영웅의 이상적 모델로 나타난다. 무수한 적과의 전투와 승리, 諸神들을 능가하는 무지막지한 힘, 好色, 소마酒의 탐닉, 기이한 출생 등의 많은 흔적들은 그가 영웅신으로 그려 졌다는 것을 자명하게 한다. 그러나 인격화된 그의 행위의 편력은 악신을 물리치고 가축과 물을 구하는 영웅적인 무훈으로부터 브라흐만 살해나 부녀자와의 간통과 같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과오에 이르기까지 뻗쳐있다. 이러한 그의 일관되지 않은 행적은 여러 시대를 관통한 베다문헌들과 서사시에서 수집되었기 때문인데, 초기 베다문헌과 중․후기 베다문헌, 그리고 서사시들에 나타난 인드라의 위상은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리그베다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찬양되던 인드라와 그의 武勇은 그 뒤에 격하되는듯한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데, 중기 베다문헌에 이르러 인드라는 이미 ‘브라흐만의 살해자(brahmahan)’라는 별명을 갖게된다. 이것은 그가 인도-이란期의 신인 wərəthraghna‘(av. 장애를 깨부수는 자)'에게서 빌려온 초기 베다期의 별명, ‘브리뜨라의 살해자(skt. vṛtrahan)’처럼 아리안 武士의 理想的인 별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다. 게다가 후기 베다문헌이나 서사시 속에서 인드라는 진정한 의미의 신들의 왕이나 영웅의 지위에서 멀어지며, 간통을 저지르는 신이거나, 또는 아예 풍요를 의미하는 비의 신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이 리그베다에서도 극히 간헐적으로 나타나지만, Mārkaṇḍeya Purāṇa와 Mahābhārata 등의 후기 문헌 등에서 잘 나타난다. 얀 곤다(J. Gonda)에 따르면, 인드라가 비의 신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인드라의 다른 기능(특히 전투기능을 보여주는 전투의 신)과 같은 기능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던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비에 가장 관심을 보였던 환경 속에서 부각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Gonda 1967, 242-243). 베다시대의 강한 구전전통과 비도상적 관습으로 인해 초기 힌두교 내부에서 제작된 여러 諸神들의 외형적 모습은 거의 확인할 수 없다. 인드라도 예외는 아니다. 반면, 비교적 초기의 불교미술 속에 들어온 인드라의 외형적인 모습은 붓다의 일생 속에서 여러 에피소드에 등장하기 때문에 다양한 모습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베다문헌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호전적이거나 욕망에 휩싸인 모습으로 형상화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거의 탈각하고, 대신 그의 신격을 보여주듯 사각이나 원통형의 관모를 쓰거나 터번을 쓴 형태로 등장하여 붓다와 주변인물들을 호위하거나 떠받드는 貴人의 모습을 취한다. 마찬가지로 후대 힌두문헌 등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탈 것, 아이라바타(Airavata)라 부르는 코끼리의 흔적도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가장 이르게 볼 수 있는 흔적은 기원전 인도 바자(Bhājā) 석굴에서 묘사된 코끼리를 타고 있는 인물상을 인드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이것이 인드라를 묘사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대신 인드라는 종종 그의 손에 자신의 무기인 바즈라 또는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흔히 벼락 등으로 해석하는 이 바즈라는 단지 벼락이나 번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번개뿐만 아니라 몽둥이를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 자체 역시 인드라보다 훨씬 오래된 인도-유럽인들의 공동 유산이라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베다문헌에는 이 몽둥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있는데 끝이 뾰족한 어떤 무기가 아니라, 돌기(bhṛṣṭi)가 있는 몽둥이를 암시한다. 바즈라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리그베다와 아베스타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인드라가 손에 들고 있는 무기는 현재 한국의 사찰이나 불교유물 속에서 확인되는 금강저와 같이 끝이 뾰족하거나 갈라진 것이 아니다. 베다 문헌에서 묘사되는 것과 간다라 불교조각 속에서 형상화 되고 있는 바즈라의 형상도 역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간다라의 불전부도 속에서 인드라가 들고 있는 바즈라는 마치 아령과 같이 양쪽 끝이 동물의 뼈와 같이 둥글거나 평평하고 약간 각이 진 것이 특징이다. 다만 예외적인 경우로, A.D. 1-2세기경 인드라가 들고 있는 바즈라 가운데 양쪽 끝이 뾰족한 경우는 산치Sanci에 새겨진 인드라의 모습에서 나타날 뿐이다. 또한 인드라, 또는 제석천이 무기로 들고 있는 것은 반드시 바즈라뿐만이 아니라 활도 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제석천의 또 다른 별명은 ‘화살을 가진 자(iṣuhasta)’이기 때문이다. 때로 활을 가진 모습으로 인드라가 조각되기도 하는데,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를 위해 성을 빠져나가는 장면(出家踰城)은 여러 조각을 통해 나타난다. 이 속에서 그의 출가를 안내하는 자가 바로 인드라다. 이 때에 활을 들고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것이 있다면, 제석천의 어떤 신체적 특징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때때로 제석천의 조각이나 회화 속에서 그의 이마에 그의 신적 권능을 상징하는 세번째 눈이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신중탱이나 제석탱 속에서도 이러한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다. 이는 보통 힌두교의 대표신 쉬바의 흔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러한 표현은 훨씬 오래전에 불교내에서 이루어진 다른 흐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워싱턴 프리어(Freer) 갤러리에 있는 마야부인의 붓다 출산 장면에서 으레 제석천은 천을 펼쳐 마야의 허리춤에서 탄생하는 싯다르타를 받아내고 있다. 이 조각은 대략 기원후 2-3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조각 속의 제석천의 이마를 가만히 쳐다보면 다른 조각에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하나의 눈이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한국의 불화 속에도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이 특이한 그의 신체적 특징은 한역이나 다른 산스크리트 문헌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실크로드를 오갔던 소그디아(Sogdia)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남긴 별도의 자카타(本生談) 속에 이 특별한 제석천의 신체적 특징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아마도 인도북서부나 중앙아시아를 오갔던 이 지역의 사람들은 비교적 일찍부터 자신들을 위한 별도의 본생담과 자신들만의 또 다른 인드라의 이미지를 통해 독자적인 불교를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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