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전적
- 주제오대산 월정사의 불교전적
- 시대신라시대
- 저자宋 日 基 (全南大學校 文獻情報學科 敎授 ; 聖寶保存委員會 및 文化財委員會 專門委員)
목차
위로 가기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전적宋 日 基 (全南大學校 文獻情報學科 敎授 ; 聖寶保存委員會 및 文化財委員會 專門委員)
Ⅰ. 月精寺의 沿革
Ⅱ. 月精寺 佛敎典籍의 現況
Ⅲ. 月精寺 佛敎典籍의 集書
1. 月精寺 傳來佛書
2. 上院寺 移管佛書
3. 諸末寺 移管佛書
Ⅳ. 八角九層石塔의 全身舍利經
1. 發掘經緯
2. 主要特徵
3. 造成�代
Ⅴ. 要約 및 提言
상세소개
위로 가기월정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五臺山 동쪽 계곡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 다. 최초의 開創은 645년(선덕여왕14)에 慈藏�師에 의해서 초창되었다고 전한다 .� 三國遺事�에는 창건 당시의 寺勢는 임시로 草茅을 얽어 거처하였던 상태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고려 閔漬의�慈藏祖師傳�에는 창건과 동시에 13층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초창의 모습이 전혀 상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초창의 양상이 문헌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전개되고 있어, 아예 慈藏조사에 의한 開創 자체를 신빙성 없는 사실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초창 이후 60년이 지난 후에 월정사 위쪽에 자리한 上院寺가 寶川과 孝明태자에 의해서 聖德王 4(705)년에 眞如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던 사실로 보아, 아마 이 무렵에 월정사 역시 초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三國遺事�의�塔像 第4� (卷3) <臺山五萬眞身>條에“下院에 文殊岬寺를 배치하여 都會處로 삼게하라” 는 기록에서 上院에 대한 下院의 개념으로 초창 당시로부터 한동안‘文殊寺’로 불리웠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遺事에 전재된 正豊(隆)元年(1156)에 白雲子가 쓴 <五臺山文殊寺石塔記>에 여전히 文殊寺라는 寺名과 함께 사찰내에 石塔의 존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遺事의<臺山五萬眞身>과 <臺山月精寺五類 聖衆>에서 一然선사의 기록부분으로 보이는 문장 가운데 비로소‘月精寺’라는 寺名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月精寺라는 寺名은 아마 一然이 생존했던 13세기 중기로부터 불리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初創 이후 신라 景德王 말기에 幼童菩薩의 화신이라고 전하는 信孝거사가 이곳에 머물렀고, 고려 태조 왕건의 집권 초기에 梵日의 문하였던 頭陀 信義가 중창불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信義가 죽은 이후 한동안 황폐한 상태로 있었는데, 水多寺의 장로 有緣대사에 의해서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이루워 비로소‘月精寺’의 사격이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조선시대에는 태조와 세조의 후원으로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내의 사찰들이 일시 중흥의 조짐이 있었다. 그후 순조 33(1833)년에 불의의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었으나, 헌종 10(1844)년에 瀛潭과 淨庵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또한 1951년에 한국전쟁의 와중에 사찰내의 모든 건물이 전소되는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이후로 呑虛와 萬和스님의 중창불사에 힘입어 오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