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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과 월정사
- 주제오대산과 사명유정
- 시대조선시대
- 저자한상길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목차
위로 가기 사명당과 월정사한상길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Ⅰ. 머리말
Ⅱ. 사명당의 수행과 불사
1. 출가와 수행
2. 사명당의 불사
Ⅲ. 사명당의 월정사 중창
1. 중창의 배경
2. 중창의 과정
Ⅳ. 맺음말
상세소개
위로 가기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1544~1610)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의승으로 투신하였다. 1608년(광해군 2) 병들어 해인사로 은거하기까지 무려 17년 동안 전장을 종횡하고 ‘원수의 집’, 일본에 왕래하며 전쟁의 종식과 동포의 귀환에 헌신하였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산성 축성과 궁궐 중수, 변방 수호 등 국가의 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혁혁한 전공을 올리고 피랍된 동포를 귀환시킨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 결과 사명당은 불가사의한 신력(神力)을 지닌 영웅으로 인식되었고, ‘호국대성(護國大聖)’, ‘구국의 성사(聖師)’로 수식되었다. 그러나 사명당은 출가수행자, 사문이었다. 억불의 시대 조선은 나라를 구한 인물이 승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국왕이 고위 장군직을 약속하며 환속을 종용하고, 사대부들은 유교의 충의(忠義)를 실천한 인물로 규정하였다. 18세기 이후 국가에서 사명당을 기리는 표충사(表忠祠)를 설립하였지만, 이 역시 출가 승려가 아니라 의병장을 제향하는 유교의례였다. 사명당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현대에도 동상의 건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동상들은 한결같이 무인(武人), 장군 같은 강인한 인상에 긴 수염과 도검(刀劍)과도 같은 석장(錫杖)을 지닌 모습이다. 출가수행자로서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들어 사명당을 의승장이 아니라 출가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조명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의 교학, 선사상, 정토사상, 법통, 사문상 등에 관한 연구이다. 사명당은 16세에 출가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49세까지 33년간 교학을 탁마하고 참선 수행에 진력한 출가 사문이었다. 일찍이 32세에 서산 휴정의 문하에 입실하여 조선 중기 법맥을 계승하는 적통(嫡統)으로 인정받는 등 억불시대의 조선불교를 짊어질 동량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사문의 삶은 일시 중단되었지만, 수행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올바르게 이해할 때 의승장으로서의 위상 역시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본 고에서는 사명당의 월정사 중창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월정사 중창은 1586년 43세에 시작하여 1590년 47세에 완성하였다. 출가자로서 이미 두 번의 깨달음을 이루고 수행과 전법 등 삶의 정점에 있던 시기에 월정사 중창이라는 고행에 뛰어 들었다. 월정사 중창 과정과 이곳에서의 발자취를 통해 출가사문 사명당의 본 모습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