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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詩僧)에서 선승(禪僧)으로
- 주제오대산과 사명유
- 시대조선시대
- 저자김풍기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목차
위로 가기 시승(詩僧)에서 선승(禪僧)으로1590년 이전 사명당의 강원도 행적과 연보 편찬의 중요성
김풍기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 서론
2. 오대산 주석 시기의 활동과 그 의미
(1) 월정사 중수(重修) 불사와 사명당의 오대산 주석 시기 비정(比定)
(2) 사명당의 후원 그룹과 기축옥사(己丑獄事)
(3) 불교 수행의 전환과 상주(尙珠) 대사(大師)
3. 남는 문제들, 그리고 사명당의 상세연보 작성에 대한 제안
<자료 1> 四溟惟政 年譜(例示案)
<자료 2> 사명당 연보 초고(例示案)
상세소개
위로 가기이 글은 1590년 이전까지 사명당의 강원도 행적을 면밀히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시기는 사명당이 출가하여 선과(禪科)에 급제한 뒤 유교 지식인들과의 활발한 교유를 맺으면서 시승(詩僧)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대산에서 머물며 살아가던 시기에 사명당은 시승으로서의 면모를 버리고 선승으로서의 삶으로 전환하게 된다. 오대산이라는 공간은 사명당에게 불교적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준 곳이라 하겠다. 이런 점을 고구(考究)하기 위해 사명당의 상세한 행적을 정리하고 이면의 문맥을 읽을 필요가 있었다. 이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상세 연보 편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명당 연구를 위해 연보 편찬 작업에 대한 시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인물에 대한 연구는 그의 생애를 상세하게 재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시대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라면 해당 시대를 총체적으로 살피는 데 중요한 열쇳말 역할을 한다. 연보 작성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한문 방식 중의 하나였다.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연보를 작성하였고(물론 이 경우는 연표年表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지리지를 편찬하면서 다양한 연보를 편찬하였으며, 개인 문집을 편찬하면서 연보를 편찬했다. 우리는 한 개인의 연보를 보면서 그의 생애를 일관성 있게 바라본다. 물론 연보라고 해서 철저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편찬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자료를 이용하여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되 편찬자의 의도에 따라 자료가 취사선택되기 때문에 연보 편찬자의 의도가 습윤(濕潤)되기 마련이다. 최근 송나라의 위대한 성리학자인 주희(朱熹)와 명나라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의 방대한 평전이 번역되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평전이 집필되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상세한 연보가 정리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근대 이전의 중국철학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이렇게 방대한 연보를 편찬한 것은 그만큼 한 인물이 가지는 철학적 상징성을 강하게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보 편찬이야말로 한 인물이 살아간 시대를 정밀하게 재구하려는 중요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유학의 확산과 함께 선학들에 대한 연보 편찬이 이루어진다. 초기에는 관력(官歷)을 나열하는 간단한 연보가 유행했지만, 조선 중기 이후 방대한 연보 편찬이 이어지면서 선학에 대한 존숭과 권위가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강화된다.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나 이황(李滉, 1501~1570) 등에 대한 연보 편찬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작업은 가문 차원에서 후손이 편찬 작업에 참여하다가 점차 명망가의 손으로 연보 작성이 이루어지면서 연보 편찬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