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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유정과 오대산 사고
- 주제오대산과 사명유
- 시대조선시대
- 저자황인규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상세소개
위로 가기조선초 문인 乖崖 金守溫(1410~1481)은 “오대산은 웅장하고 깊으며 높고 큰 것은 풍악과 더불어 서로 甲乙이 되는 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금강산은 法起菩薩이 머물렀고 오대산은 文殊菩薩이 머물렀다고 한다. 李荇(1478~15340)도 “천년의 승지라서 보배로운 곳[寶地千年勝]이라고 하였다. 특히 “우통은 五臺山 上院寺 곁에 있는데, 바로 漢江의 상류로서 우리나라 第一의 川이라 한다.”고 하여 조선 건국후 한강의 발원이 되는 于筒水가 있는 月精寺와 上院寺를 비롯하여 오대산사가 조선 건국후 주목되었을 것이다. 牧隱 李穡(1328~1396)은 “오대산은 천하의 명산이요, 상원은 또한 큰 사찰이다.” 라고 하였다. 실제로 조선의 최대의 호불 군주 세조에 의해 상원사가 중창되고 조선 중기 실록의 사고가 설치되어 조선시대 摠攝僧을 두는 등 오대산 불교의 사세는 계속 흥성되었다. 최근에 필자는 여말선초 懶翁 惠勤과 문도들이 등장하여 오대산과 그 북대 불교를 중흥하고자 하였다. 나옹의 입적후 무학을 비롯한 나옹 문도들은 나옹의 자취가 서린 전국 각지에서, 특히 오대산에서도 추념 불사를 하면서 여말선초 오대산 불교를 중흥하여 고대 불교를 재현하였다. 그후 나옹의 선풍을 이은 세조의 三和尙인 慧覺尊者 信眉와 두 제자 學悅과 學祖 등을 거쳐 조선 중기 불교를 중흥시킨 淸虛 休靜과 그의 문도 四溟 惟淨이 오대산 불교를 계승했다. 유정은 1587년 무렵 오대산 靈鑑菴에 머물면서 1589년 월정사를 중건하였고, 이어 1605년(선조 38) 6월에 다시 오대산으로 와서 그 이듬해(1606) 4월 오대산의 영감암에 실록을 보관하는 五臺山 史庫를 건립하였다. 본고는 유정과 오대산 사고와 관련성을 주목하면서 영감암 중수와 오대산 사고의 설치가 갖는 불교사적 의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