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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정경 과 7세기 신라 밀교
- 주제관정경 과 7세기 신라 밀교
- 시대7세기
- 저자옥 나 영
상세소개
위로 가기밀교의 현세 이익적인 성격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토속 신앙과 융합되면서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즉, 불교가 재래신앙을 포섭하면서 토착화되어 신라사회에 사상적 이념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삼국유사 의 여러 기사를 통해 나타난 다. 이렇게 전통 신앙과의 매개적 역할을 담당했던 밀교는 7세기에 새롭게 부각되었다.
그 동안 7세기 밀교의 모습은 삼국유사 신주편의 밀본최사·명랑신 인·혜통항룡과 기이편의 문호왕법민 및 의해편의 이혜동진·의상전교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기존의 연구경향을 간략하게 분류하면, 먼저 밀교의 사상과 교리를 살핀 연구들이 있으며
신라 불교계에서의 밀교의 역할과 성격을 밝힌 연구들이 있다.
또한 신주편 기사와 그 외 기사들의 내용 분석을 통해 밀교 모습을 살핀 연구도 진행되었다.
한편 원광·안홍 (안함)의 행적에서 밀교적인 성격을 밝혀내어 연구의 범위를 넓혔으며, 특히 자장에게서 밀교적인 모습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신라는 중고기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경제적 발전과 제도 정비를 통해 국력이 신장되었고, 7세기에 들어서자 이를 바탕으로 삼국통일을 추진해 나갔다. 한편 신라 불교계는 불교 공인 이후 국가의 정책적 지원과 승려들의 다양한 활동에 힘입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단계의 불교사상을 정립하는 동시에 대중교화에 힘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시기는 신라에 초기밀교가 전래되었던 때로 밀교계 승려들의 활동이 두드 러졌으며, 신이영험의 사례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그 중에서 왕실과 귀족과의 연계를 통하여 활동하였던 자장·밀본·명랑은 밀교계 경전인 관정경(灌頂經) 에 의거했을 가능성이 크다. 관정경 에는 사리 탑의 호국적인 성격, 국왕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 문두루비밀법 등 호국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러한 점은 통일전쟁이 계속되어 대외적으로 어려 움을 겪고 있던 7세기 신라 왕실에서 관정경 에 의한 활동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이 시기 신라에서의 밀교의 역할및 성격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기존에 신라 계율의 전파자 또는 화엄사상가로 평가되었던 자장에게서 관정경 을 통한 신앙 활동을 찾는 것은 신라불교에서 밀교적인 면이 비단 ‘밀교승’이라 분류되는 승려의 활동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밀교적인 불교가 비단 서민·대중계층에게만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가 밀본에 이르러서야 왕실 및 귀족들에게까지 파급되었다는 기존의 해석도 수정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