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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초 신라왕권의 강화와 불교
- 주제—원광과 자장의 역할을 중심으로—
- 시대7세기 초
- 저자송준혁
목차
위로 가기 7세기 초 신라왕권의 강화와 불교—원광과 자장의 역할을 중심으로—
송준혁
Ⅰ. 머리말
Ⅱ. 정치적 배경
Ⅲ. 정치개혁
Ⅳ. 원광과 세속오계
Ⅴ. 자장과 신라정치
Ⅵ. 승관제의 체계화
Ⅶ. 불교․유교 가치의 혼합
Ⅷ. 맺음말
상세소개
위로 가기고대 삼국시대 불교의 구체적인 내용, 성격과 역할을 정리하면 아 래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해진다. 왕실은 불교에 대해서 후한 지 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불교는 轉輪聖王, 彌勒, 菩薩 등의 상징적 중 요성을 왕실에게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왕실의 지위를 신성시하는 이념적 기틀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불교를 받아들인 후에 세워진 <廣 開土王陵碑>․<모두루묘지>․<마운령비> 등은 왕의 지위를 신성 화하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주몽이 出生自有聖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모두루묘 지>에는 고구려의 왕들을 聖王 내지 聖太王이라고 반복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6세기에 세워진 한 비에는 '聖王法興'이라고 법흥왕을 기 술해 놓았다. ≪三國遺事≫에 기록된 설화에 따르면, 진흥왕은 전륜 성왕 이념의 현현인 인도 아소카왕과 동일시하였으며, 6세기의 백제 통치자도 聖王이라고 불렸다. 그러한 신성화의 개념은 이전 시기의 비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고대 삼국의 승려들은 중국 제국질서의 중요한 요소인 儒佛 仙思想의 필요한 요소를 빌려 자기나라의 정치체제의 기반을 확고히 하여 사회통합을 이룩하고 문화를 융성케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圓光과 慈藏을 한국 초기불교사에서 사회참여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국민윤리의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삼국 가운데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로 하여금 삼국을 통일케 한 정신적인 원동력을 부 여하였던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원광법사와 자장율사가 살던 7세기 신라사회가 새 로운 가치관과 실천 윤리를 필요로 했던 배경을 분석하고 나아가 그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윤리관으로서의 이 두 승 려의 사상체계의 현실적인 의의를 이해토록 한다. 해당 시기의 여러 승려들 가운데 오직 이들만의 전기가 한국측 자료인 ≪三國遺事≫․ ≪해동고승전≫ 과 중국 측 자료인 ≪속고승전≫에 자세히 실린 사 실도 그들이 그 당시 동아시아에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증명 해 준다. 이 논문은 단순한 사상적 문제보다는 국가발전과 삼국통일 의 실제적 측면을 중시하는데 목적을 둔다. 그러나 신라 중고기의 정 신세계를 주도하는 이 두 승려의 사회, 정치적인 역할을 이해하기 위 해서는 먼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