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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지역 新羅 火葬墓에 대하여
- 주제경주지역 新羅 火葬墓에 대하여
- 시대7세기
- 저자石 秉 哲
상세소개
위로 가기죽은 사람을 불에 태워 버리는 火葬은 불교식의 장법으로 인도에 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삼국시대 말 우리나라 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경우는 火葬墓의 사례가 거 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백제와 신라의 古都에서 화장묘가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신라의 경우는 삼국시대 말에서부터 삼국통일 이후에도 횡혈식석실분과 함께 조영된다. 화장묘의 발굴 조 사 예는 거의 적고 대부분이 藏骨器만 수습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장묘의 연구 범위가 장골기에만 국한되어 화장묘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화장묘의 구 조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조사를 통해 알려지고 있어 이전에 소개된 자료와 함께 정리할 필요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장골기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화장묘의 구조, 장 골기의 구성, 조성배경, 피장자 등에 대해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것 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점 등을 주목하여 시간 적으로는 대체로 7~9세기까지로 한정하고 공간적으로는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신라의 화장묘를 살펴보고자 한다. 화장묘 연구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인 薺藤忠과 有光敎一 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신라시대 최초의 화장 을 ≪三國史記≫에 있는 文武王의 火葬(681)에 두고 통일신라시대에 화장이 성행했음을 강조하며 경주를 중심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화장묘의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姜仁求는 부여일대에 분포하는 백제 화장묘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화장묘의 구 조, 장골기의 배치, 기형, 부장품의 실체를 밝히게 되었고, 장골기 대 한 인식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0년대 화장묘의 연구는 장골기를 중심으로 기형과 문양 등을 통하여 신라시대 장골기의 편년을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왕에서 일반 인에게까지 화장이 유행한 것으로 이러한 화장묘가 9세기에 사찰의 僧塔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신라시대 화장묘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1980년대 말 鄭吉子에의해서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신라 화장묘의 구조와 장골기의 구 성․재료․기형 등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하였다. 이와는 달리 宮川 禎一은 인화문 토기의 편년 안에 장골기를 포함시켰으며, 이를 별도 로 구분하여 이에 대해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최근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신라 화장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 다. 洪普植은 장골기의 유행은 곧 불교식 장법인 화장이 성행하였음 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화장묘의 지방으로 확산은 지금까지 행해져 왔던 고분축조 행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여 고분의 종언을 가져오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森本徹는 삼국시대의 초기 화장 묘에 대해서 한국 남부지역과 일본에서의 화장묘의 도입 과정을 비교 하여 화장묘의 피장자와 화장의 기술, 횡혈식석실분과의 관계 등 다 각적인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김호상과 김재현은 2001년에 조사한 석 장동 유적의 화장묘 구조를 통해서 새로운 화장묘를 파악하고, 인골 분석을 실시하여 피장자의 성별과 연령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백제 화장묘에 대해서 山本孝文의 최근 연구가 있다. 화장 묘 분류의 문제, 장골기의 용적 문제, 피장자에 대한 문제, 편년 등 다 양한 측면에서 부여지방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백제 화장묘의 양상에 대해서 검토하였다.이상의 연구사를 통해서 보면, 신라 화장묘 연구의 시작은 장골기 를 중심으로 화장묘에 대해 인식하였으며 정길자를 시작으로 최근의 연구에서 화장묘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본 글에서는 신라 화장에 대한 기록에 먼저 살펴보고 경주지역의 신라 화장묘의 대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소개된 신라 화 장묘의 사례를 통하여 화장묘를 분류안을 제시하여 이를 토대로 신라 화장묘의 변화 양상을 파악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