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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무구정광다라니경 제작연대 논란에 부친다

  • 주제석가탑 무구정광다라니경 제작연대 논란에 부친다
  • 시대7세기
  • 저자朴 相 國
목차
위로 가기 석가탑 무구정광다라니경 제작연대
논란에 부친다
朴 相 國
Ⅰ. 742년에 석가탑은 세워졌고
무구정경은 그 이전에 간행되었다.
Ⅱ. 무구정경이란?
Ⅲ. 보협인경
Ⅳ. 맺음말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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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平 4年 歲次 甲子(1024) 三月日에 중수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불국사 무구정경탑 중수기와 大平十六年丙子(1038) 六月에 작성된 동 重修形止記에 의하면, 석가탑은 창건년도가 742년이며, 따라서 그에 봉안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은 742년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석가탑이 751년에 완공되었다고 보았고 완공된 이후는 한 번도 중수가 없었다는 것이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 정경은 세계최고 인쇄물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 였다. 한데 난데없이 올해 3월 9일자 조선일보가 보도한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나온 무구정경이 세계최고 인쇄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기사 는 국내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어리둥절하게 했다. 더구나 이 보 도에는 “석가탑 중수기 판독결과 11세기 탑 보수 때 넣어”라는 副題 와 함께 수록된 중수기 사진을 대하면서 나는 언젠간 닥쳐야 할 일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실 이번 보도 내용이 나에게 금시초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금년 2월 하순 쯤, 연합뉴스 문화부 학술전문기자로 있는 김 태식씨가 일러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함께 하게 된 그날, 김 기자는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중수기를 판독하느라 애를 먹고 있 는 모양인데, 거기에 무구정경을 중수 때 집어넣었다는 대목이 있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양”이라고 하면서, 그런 내용이 섣불리 다른 언론사에 들어간다면 아찔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므로 박물관의 C 부장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해 두었다 고 말했다. 그때부터 불안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한데 그로부터 보 름 만에 조선일보 보도로 현실화한 것이다. 아무튼 문제의 보도가 나 온 다음날인 3월 10일자 같은 신문은 “국립중앙박물관은 1024년 석가 탑을 중수할 때 무구정경을 탑 안에 안치했다는 사실을 석가탑 중수 기 해독 과정에서 확인했다고 9일 밝혔다”고 추가 보도를 했다. 그리 고 이어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무구정광다라니경이 신라나 고려 때 제 작되었을 가능성은 각각 반반이라고 본다”라는 관련 인터뷰 내용을 보고는 나는 아찔한 생각에 휩싸였다. 나는 적어도 이들 보도를 접한다. 당시에는 박물관이 충분히 중수기를 판독한 후에 내린 결론으로 믿었 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앞서 1997년 12월에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서 이번 중수기 가 포함된 석가탑 墨書紙片을 보존처리한 후 ‘大平 4年 歲次 甲子 (1024)三月日 瑜伽業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와 ‘大平 十八年 戊寅 (1038) 正月日東 … 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를 보고 몇 사람이 긴장 했던 적이 있었다. 그 후 2005년에 중수기 존재가 알려져 각 신문마다 무구정경 간행년도를 두고 일대 논란을 벌인 기억이 있다. 사실 1997 년 겨울에 묵서지편을 보존 처리하고 난 뒤에 그 내용이 몇 사람에게 알려졌는데 우선 겁이 나서 쉬쉬하다가 2005년 9월 중수기에 대한 신 문보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이 걱정이 되어 당시 관장에게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사진 자료를 넘겨달라고 하였으나 주지 않았 다. 그리고 현 관장에게 1월 중순에 또 같은 부탁을 하였으나 협조를 받지 못하였다. 정년을 하고 난 뒤 그동안 해결 못한 가장 중요한 숙 제로 생각했던 것이고 만에 하나 섣부른 판단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 을 폄하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기에 심혈을 기우려 내용을 파악해서 그 대책을 마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신문기사를 보면 마치 중수기를 온전히 판독한 후에 내린 결론처럼 보였다. 그동안 무구정경의 신라시대 간 행 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그런 주장을 앞장서서 주 창해 온 사람 중 한 명인 나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2005년도에 세운 논리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이 중수기 이 름이 ‘무구정광탑중수기’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석가탑이 신라 때 무구정경에 의해서 조탑되었음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 고, 나아가 1007년 개성 총지사 간행 보협인다라니경과 비교해 보아 도 인쇄기술사적으로 연대가 올라간다는 점과 고려로 넘어오면서 조탑경의 위치가 무구정경에서 보협인다라니경으로 바뀐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조선일보 보도가 오보라고 주장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혹시 내가 잘못 판단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뒤따랐다. 한데 조선일 보 관련 보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중수기를 정확히 판독하고 내린 결론이 아닌 것으로 이내 밝혀졌다. 이런 와중에 3월 21일 나는 다음과 같은 중앙일보 보도에 다시금 경악 했다. “국보 126호 무구정경은 과연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목판인쇄물인 가. 불국사 3층 석탑의 완공연대가 신라 혜공왕대(765~780)로 드러나면 서 이 부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770년께 인쇄된 일본의 ‘백만탑다 라니경’이 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번 중수기를 통해 무구정경은 최소한 간행년도가 9년 이나 앞당겨졌기 때문이었다. 우선 重修記에 無垢淨光塔重修記라고 되어있어 탑 이름이 무구정광탑이고 창건연도가 天寶元年(742)壬午元 成立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重修形止記에도 天寶元年壬午(742)元開 刱으로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뒤따르는 惠恭王 시대에는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혜공왕 때는 석가탑 주변 지반 다지기 등의 보수 또는 미비한 관련 주변시설 을 정비작업을 했을 것이다. 예컨대 법당을 준공하고 난 뒤 그것을 장 엄하기 위한 단청과 같은 일이 그것이다. 석가탑은 백운교와 청운교 를 넘어 자하문을 통과하면 불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대웅전 앞에 다보탑과 더불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당시 탑은 부처님 사리 를 모신 곳으로 법당 이상의 신앙 예배장소이므로 주변 정비 공사는 반드시 후에 따르는 공사다. 따라서 탑 주변인 자하문과 동서 행랑 등 은 뒤에 정비 차원으로 공사를 벌였을 것이다. 또한 석가탑을 둘러싼 八方金剛座는 무구정경에 의한 密敎 法式을 행하는 의식용 金剛座로 생각되기 때문에 이 부분 또한 혜공왕대에 정비가 되었을 것이다.아가 혜공왕 때는 이미 석탑을 건립한지 적어도 23년이 지난 뒤가 되 므로 지반이 침하하여 탑이 기울수도 있고 하여 補修 내지는 주변 행 랑 공사 등 후속 정비공사가 이어졌을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중수기와 관련한 무구정경에 관한 각 신문 보도가 1 개월이 넘도록 계속하면서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들 보도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고, 나아가 시종일관 객관성을 유지한 언 론도 있었지만, 불국사 삼층석탑의 묵서지편에서 나온 1024년의 중수 기와 1038년의 중수형지기의 내용이 어느 정도 확실해 지면서 괜한 소동이었다는 상념은 지금도 지울 길이 없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나는 왜 중수기 내용을 면밀하게 파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자료가 유출되었는지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아 가 언론의 속성이란 측면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중수기 나 형지기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실과 동떨어 진 보도를 하게 되었는지도 아쉽기만 하다. 중수기와 형지기에 의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천보원년(742) 開刱이 라는 석가탑의 창건연도가 밝혀진 대목인데 이를 거의 주목하지 않았 다. 그동안 막연하게 추정하였던 석가탑 창건연도가 742년이라고 기 록된 가장 확실한 자료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혜공왕대 는 석가탑을 창건한 시기가 아니라 보수 내지는 주변을 정비한 시기 로 봐야할 것이다. 이 중수기와 그 형지기는 불국사 삼층석탑이 신라 경덕왕 원년인 742년에 무구정광다라니경 사상에 의해서 당시 목판 으로 인쇄된 무구정경을 봉안하여 창건된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신뢰할 만한 고문서이다. 동시에 이 문서는 金銅製長方形盒 등 제작 양식상 의문이 있었던 유물이 고려초에 納入 되었음이 밝혀진 귀중한 자료이며 이두와 구결 이 듬뿍 들어있는 고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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