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송운(松雲) 유묵(遺墨) 고찰 > 학술자료실

화엄선 연구소 소개

오대산 역대 선지식

학술 자료실

특별강연자료실


학술자료실

학술자료실


본문

사명대사 송운(松雲) 유묵(遺墨) 고찰

  • 주제오대산과 사명유정
  • 시대2024년
  • 저자윤창화 (민족사 대표, 당송시대 선종사원 연구가)
목차
위로 가기 사명대사 송운(松雲) 유묵(遺墨) 고찰
- 사명대사 송운(松雲)의 유묵(遺墨) 400년 만에 오대산
월정사로 귀환-
윤창화
민족사 대표, 당송시대 선종사원 연구가
1. 서론
2. 사명대사 유묵의 간단한 분석
3. 유묵(遺墨) 해석
4. 이 유묵은 누구에게 써 준 것인가?
5. 임제종 교토 5산(京都五山)과 에도막부(江戶幕府)
6. 경산 37대손에 대한 해석(徑山 三十七代孫)
7. 이 유묵의 최근 소장자
기타-달마 그림

상세소개
위로 가기

지난 2024년 5월 조선시대의 대표적 선승 사명(四溟)대사 송운(松雲) 유정(惟政, 1544~1610) 의 친필 유묵이 인연이 깊었던 오대산 월정사로 귀환했다. 사명대사는 오대산 사고(영감사)에서 약 5년간 주석(己丑(1589년), 迻住五臺山, 靈鑑蘭若. 사명비문, 사명당대사집)하는 등 오대산과도 적지 않은 인연을 갖고 있는데, 때마침 이 유묵의 월정사 귀환은 사명송운과 월정사 관계의 의미심장한 모멘텀을 제공하고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義僧兵)을 조직하여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여하는 등 왜군 격퇴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만나 왜군 철수 및 종전(終戰) 회담을 주도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들이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는 어떤 보배가 있는가.”라고 묻자, 사명대사는 “우리나라에선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소.”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이후 강화정사(講和政使)가 되어 교토로 가서 쇼군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전쟁 당시 끌려간 조선인 포로(1,800명~3,500명)를 데리고 왔으며, 사명대사의 이런 노력은 이후 정기적인 조선통신사 왕래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명당 송운 유정이 선조의 명을 받고 탐적사(探賊使) 및 강화정사(講和政使)가 되어 일본으로 출발한 것은 1604년 8월이다. 대마도에서 3개월을 머문 뒤 교토에 도착한 것은 다음 해인 1605년 1월이었고, 교토(京都)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에도막부(江戶幕府), 德川幕府)의 쇼군(將軍)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난 것은 그해(1605년) 봄이다. 에도막부가 성립(1603년)한 지 2년째 되던 해이다.


첨부파일


대표 : 퇴우 정념스님 주소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전화 : 033-339-6800 / 팩스:033-332-6915
COPYRIGHT © 화엄선연구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