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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臺山圖의 티벳 전파와 내륙아시아 불교세계 속에서 五臺山의 위상
- 주제五臺山圖의 티벳 전파와 내륙아시아 불교세계 속에서 五臺山의 위상
- 시대824년
- 저자金 成 修
목차
위로 가기 五臺山圖의 티벳 전파와 내륙아시아 불교세계 속에서 五臺山의 위상金 成 修
1. 吐蕃은 왜 五臺山圖를 요청했을까?
2. 내륙아시아 불교 세계와 五臺山
3. 五臺山으로 가는 길: 河曲을 둘러싼 8
세기 후반 唐∲吐蕃(푀첸보) 관계
상세소개
위로 가기824년(長慶 4) 吐蕃의 사신이 靈武를 방문했다. 토번은 7~9세기 오늘날 신강, 감숙, 섬서, 사천 등 중국 서북에서 서남에 이르는 너른 지역에서 唐朝와 대결했던 강대한 제국이었다.
1641년 文成공주, 710년 金城공주를 토번에 시집보내 양자의 우호증진을 위해 노력했던 점에서도 보이지만, 그만큼 두 나라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 감이 지속되었다. 여러 차례의 치열한 전투 끝에 763년 가을에는 장안이 점령되었고 금성공주(?~739)의 형제 廣武王이 황제에 등극하기도 했으니 양자의 군사적 충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후에도 국지전은 계속되었지만, 824년을 전후한 장경 연간 이래 양국 간 사신의 교환은 끊이지 않았고, 대략 842년(會昌 2) 무렵까지 지속되다가 마지막 젠보 랑다르마(?~846)의 사망으로 토번 정세가 혼란 해지면서 당과 토번과의 직접 교류는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9세기 전반 잠시나마 양국 관계가 평화적 국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822년 장경 회맹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장경 회맹 후 靈武에 이른 토번의 사신은 당조에 五臺山圖를 요청했다. 불교의 중국 전파 후 비교적 이른 시기 황하 유역에 형성된 불교의 성지로서 오대산의 명성은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강원도에도 문수보살의 도량 오대산을 낳았다. 산서성 오대산에 건설된 사원의 모습과 위치를 소개하고 있는 五臺山圖를 토번의 사신이 구하고자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634년(貞觀 8) 처음 토번이 당에 사신을 파견한 이래 토번은 주로 황금으로 주조한 각종 물품과 가축을 선물로 가져왔고, 당에서는 대개 비단과 각종 공예품을 하사 했다. 그러나 이외에도 토번은 때로 여러 종류의 물품을 요구했는데, 그 중에는 서적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