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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金庾信系의 정치적 위상과 추이
- 주제신라 金庾信系의 정치적 위상과 추이
- 시대신라시대
- 저자김 수 미
상세소개
위로 가기김유신은 무열계와 함께 삼국을 통일한 주역이었다. 그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유래가 없는 太大角干이라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이는 김유신계가 신라 중대에 들어서면서 무열계와 함께 진골가문 중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등장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김유신계도 중대 말에 이르러서는 그 이전과 다른 정치적 상황들에 놓이게 된다. 신라 중대 왕권이 강화되면서 김유신계도 무열계로부터 견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긴박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중대 말에서부터 하대 초에 이르는 왕족간의 정치적 쟁투 속에서 김유신 계가 어떠한 양상을 보이는지 그의 후손들의 활동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기존의 김유신가문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는 주로 김유신의 삼국통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김유신의 조부인 武力에서부터 元述에 이르는 시기에 한해 이루어졌거나, 몰락과정을 살펴 允中과 巖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 다. 이들 연구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의 내용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좀 더 심도 있는 연구는 이기백에 의해서였다. 그는 김유신의 후손 중 열전에 나오는 김암의 활동에 주목하여 김암이 혜공왕대 반혜공파로 김유신계의 신원운동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 연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형식은 김유신계가 중대 말에 이르러 위축되었거나 진골에서 6두품으로 族降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이 설들은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큰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최근 이와 상반되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 김유신계는 신라 왕족의 혈통으로 가야계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김유신의 후손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김유신계는 신라 중대 말 중앙 정계에서 소외 되거나 6두품으로 족강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김유신의 후손들에 대한 연구는 전혀 다른 두 견해로 나누어진다.
이 글에서는 중대 말에서 하대 초에 이르는 인물들 중 김윤중과 김암, 그리고 김유신계로 추정되는 金雄元에 이르는 김유신계의 활동과 정치적인 역할을 살펴보았다. 이들 김유신계의 활동을 추적한 결과 김유신계의 족강이나 쇠락은 중대 말이 아니라 그보다 더 이후 즉 신무왕 즉위 이후로 보인다. 김유신 계는 중대 말에 무열계와 동반 몰락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새로운 선택을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