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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과 효명의 오대신앙
- 주제보천과 효명의 오대신앙
- 시대신라시대
- 저자X
목차
위로 가기 보천과 효명의 오대신앙1. 문제제기
2. 오대산 은거와 종교체험
1) 보천과 효명의 오대산 은거
2) 보천과 효명의 오대산 정착
3) 보천과 효명의 종교체험
3. 오대신앙의 완성과 의의
1) 오대신앙의 구조와 특징
2) 하원의 문수갑사와 월정사
4. 소결
상세소개
위로 가기자장의 오대산 개창 이후로 오대산을 찾게 되는 중요한 인물은 신라중대 말의 보천과 효명 이다. 대산오만진신에는 자장의 정암사에서의 비극적인 말로 이후에 사굴산문 범일의 문인인 두타승 신의와 수다사 장로 유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신의는 오대산사적에는 범일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범일의 연대가 810 ~ 889년이니까, 신의는 이보다 최소 10년 이상 늦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범일 이 당에 유학해서 회창법란과 관련되어 귀국해 자리를 잡은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신 라인 제자와의 연배는 더 차이가 나기 쉽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효명의 705년 상원사 개창을 통해서 효명을 성덕왕(재위 702 ~ 737)으로 판단할 때, 신의는 효명보다 약 100년 정도 늦 은 인물이다. 또 수다사의 유연은 누구인지 불분명하지만, 신의의 뒤에 등장하는 걸로 보아서 신의보다도 후대 인물로 판단된다. 실제로 오대산사적에는 제1조사전기 다음에 「淨神3)太子孝明太子傳記」가 수록되어 있고, 그 뒤에 「信孝居士親見五類聖事蹟」이 등장한다. 그리고 신효거사항의 말미에 신의와 유연에 대 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즉 ‘자장 → 보천과 효명 → 신효 → 신의 → 유연’의 순서인 것이 다. 이러한 기록은 자장의 개창과 보천에 의한 오대신앙의 정립 그리고 신효에 의해서 드러나 는 오대와 오류성중의 관계, 끝으로 신의와 유연으로 마쳐진다. 그런데 왜 대산오만진신에는 자장의 끝에 신의와 유연을 수록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보천 과 효명을 그 뒤에 두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대산을 신의를 통해서 사굴산문과 연관지으려 는 측면. 그리고 수다사라는 자장의 명주 주석사찰을 통한 자장에 대한 승계가 오대산에 있었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굴산문은 낙산사까지도 권역에 둘 정도로 강성했고, 이는 고려후기까지 일연과 보우·경한 의 가지산문과 더불어 나옹과 자초를 통한 최대 산문으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굴 산문과 오대산을 연결시킬 필연성은 사굴산문의 성세와 관련해서 후대에 요청되는 측면이 존 재할 수 있다. 또 수다사와 같은 경우는 기록에서 확인되는 명주에 자장이 창건해서 주석한 유일한 사찰이다. 더구나 수다사는 오대산과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오대산과 같은 경 우는 자장이 개창했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3일과 7일 동안 자장이 머물며 문수친 견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것이 고작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문제점을 일부라도 해소해서 정 당성을 부여하는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오대산과 관련된 권위부여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