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佛敎塔의 기원과 탑돌이 문화의 성립
- 주제佛敎塔의 기원과 탑돌이 문화의 성립
- 시대현대시대
- 저자자 현 스님
목차
위로 가기 佛敎塔의 기원과 탑돌이 문화의 성립자 현 스님
Ⅰ. 序論 – 불교이전의 탑 문화
Ⅱ. 印度佛塔의 기원
1. 붓다 재세시의 불탑
2. 根本八塔과 八大靈塔
Ⅲ. 불교탑의 양식과 탑돌이의 기원
1. 불교의 세계관과 불교탑
2. 인도의 예법과 右遶三匝
Ⅳ. 結論 – 중국탑의 변형과 탑돌이의 변화
상세소개
위로 가기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문화는 정주의 농경문화와 달라서, 시체를 매장해 지속적인 사후관리를 하는 것이 어렵다. 또 유목 환경은 상대적으로 지형지물이 적기 때문에, 별을 보고 이동하 는 방식이 발달하게 된다. 黃道十二宮에 대한 존숭이나 占星術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또 척 박한 지상 환경과 광활한 개활 공간으로 인해, 하늘에 대한 존엄성은 보다 강조되게 마련이 다. 이와 같은 유목문화적인 측면들이 결합되어, 인간을 火葬하고 연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다는 관점을 파생하게 된다. 供犧에 의한 火祭나 燔祭 역시, ‘하늘 위의 신’과 ‘연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구조’라는 점에서, 우리는 상호 유사한 관점을 읽어 볼 수 있다. 인도의 초기윤회론인 五火·二道說 중 五火說은, 화장에 의해 연기를 타고간 자의 순환을 말 하고 있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 쁘라바하나 자이발리왕은 슈베따께뚜에게 사후세계가 죽은 이들로 가득차지 않는 이유에 관해서 말해준다. 자이발리왕은 인간의 영혼은 화장의 연 기를 타고 달에 들어갔다가, 비로 내려와 식물에 흡수되고 이것이 다시금 남성에게 섭취돼 정 자가 되어,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모태로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즉 ‘①달→②비→③식물→④정 자→⑤모태’라는 불(火祭)을 중심으로 하는 오화설을 말한 것이다. 이는 유목의 화장문화가 농경의 순환론과 결부되어, 윤회론이라는 새로운 해법을 탄생시키고 있다 모습을 잘 나타내준 다. 이것이 영혼불멸설에 기초한 윤회론이며, 이는 다시금 ‘祖道’와 ‘神道’라는 二道說과 연결 되면서 解脫論을 제시하게 된다. 중국 南宋의 朱熹 역시 죽은 귀신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왜 꽉 차지 않는가‘라는 문제의식 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희는 중국전통의 靈魂滅說, 즉 神滅論을 바탕으로 영혼이 한시적 으로만 존재하다가 흩어진다는 氣論에 의한 해법을 제시한다.즉 죽은 영혼에 의해서 세계가 가득차지 않는 이유와 관련해서, 인도에서는 영혼불멸설을 바탕으로 한 윤회론이 파생되고, 중국에서는 신멸론과 기론에 입각한 消滅說이 완성되는 것이다. 오화설은 아리안족의 유목에 따른 화장문화가, 농경의 순환론과 결합되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준다. 이는 화장 이후에도 墳墓와 같은, 일종의 망자를 기릴 수 있는 추모상징이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망자에 대한 추모와 추모상징은, 인류의 신석기시대부터 발견되 는 일류의 유구한 측면이다. 그러나 추모상징과 같은 경우는, 정주문화를 가진 농경과 보다 밀접한 연관관계를 보이면서 발전한다. 이는 농경의 정주문화가, 추모상징을 보존하고 관리하 기에 보다 적합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아리안족의 유목전통에 따른 화장문화가, 원주민의 농경문화와 결합되면서 화장 후에 망자를 기릴 수 있는 추모상징을 파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탑(stūpa)이다. 탑은 본래 墳墓라는 의미이지만, 이를 통해 망자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기념’이라는 뜻도 내 포한다. 즉 탑에는 ‘분묘탑’과 ‘기념탑’의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하며, 이러한 양자는 후일 분기 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를 불교에서는 각각 수투파stūpa와 차이티야caitya라고 하는데, 두 가지 모두 인도적인 연원은 붓다 이전으로 소급된다. 인도탑 문화에 기념탑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하는 것은, 윤회론 때문에 분묘로서의 특수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즉 윤회를 통해서 (일종의 영혼과 같은) 실체는 이미 그곳에 없 기 때문에, 인도탑에는 상대적으로 추모상징의 의미가 강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는 동아시아의 분묘가 특수성이 강한 것과는 달리, 인도탑이 보편성으로 발전·전개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겠다. 불교경전에 나타나 있는 비불교탑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바이샬리 성 서쪽에 위치한 多子 塔(Bahuputraka-caitya, 혹 千子塔·放弓仗塔)이다. 다자탑은 천명의 아들을 낳은 여성에 대 한 일종의 기념탑이며, 선종 三處傳心의 多子塔前半分座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또 마하가 섭이 붓다를 최초로 친견해서 제자가 되고, 마하가섭의 좋은 옷과 붓다의 분소의를 맞바꾼 곳 이며, 붓다의 교화로 마하가섭이 9일 만에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는 장소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다자탑은 마하가섭의 인연처라고 하겠다. 붓다가 다자탑에서 설법했다는 것은, 당시 이곳이 단순한 해당 여성의 추모나 기념공간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즉 기념탑의 의미를 읽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다자탑 은 많은 아들을 두려는 祈子의 성소이자, 자식을 잘 키우려는 여성들이 찾는 참배공간이었을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士大夫家 여성들이 신사임당의 그림을 방에 걸어두고, 율곡과 같은 아들을 낳으려고 했던 것과 비견해 볼 수 있다. 신사임당은 율곡의 어머니인 동시에 현모의 상징이다. 즉 여기에는 사실과 상징이 존재하며, 조선후기 여성들이 원했던 것은 이 중 상징 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탑의 강한 상징성은, 탑이 외진 곳이 아닌 번화한 공간에 존재 할 수 있고, 사람들이 꺼리는 대상이 아닌 찾고 싶어 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실제로 붓다는 당신의 화장탑 건립 장소와 관련해서, 아난에게 4거리의 중앙을 지시하고 있 다. 만일 당시 인도인들에게 탑이 꺼리는 대상이었고 이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면, 불탑 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건립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근본팔탑의 건립 위치가 붓다의 유훈에 따라 4거리의 번화가에 건립되었다면, 당시 인도인들의 의식에 탑은 꺼리는 대상이 아 니었다라는 점을 우리는 분명하게 인지해 볼 수 있다. 불교는 인도의 전통문화인 탑을 계승한다. 그러나 인도전통을 그대로만 수용한 것은 아니다. 『十誦律』 권26에는 비구들이 건립한 迦葉佛塔이 閻浮提 안의 최초 탑이라고 기록되어 있 다. 이는 사실은 아니지만,우리로 하여금 인도탑과 불교탑의 분리관점이 불교교단의 인 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된다. 또 붓다는 율장 등의 전적에서, 누차에 걸쳐 탑의 건립주체를 如來·聖弟子·辟支佛·轉輪 聖王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는 불교에서는 기릴만한 대상만 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실제로 『십송율』 권47에는 提婆達多 破僧加의 핵심가담자 중 한 명인 迦留羅提舍가 죽 자, 출가한 누이들이 탑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이를 迦陀比丘가 聖者가 아닌 자의 탑은 건립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헐어버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인도의 전통적 인 탑문화와 불교탑의 제한적인 관점이 상호 충돌하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이 기록 안 에는 가류라제사의 누이들이 승단에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기각되는 내용이 함께 수록되어 있 다. 또 『四分律』 권50에는 신도(白衣)의 탑에는 승려들이 禮를 갖추지 못하도록 하신 기록도 있다. 율장 등에서 확인되는 건탑주체에, 벽지불과 전륜성왕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건탑이 불교 만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또 전륜성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통해서, 수행자나 종교인만을 건탑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불교탑은 인도탑의 전통 을 계승하면서도, 기릴만한 의미가 존재하는 대상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답을 건립할 수 있다 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탑에 기념탑의 의미가, 인도 전통탑에 비해서 보다 더 강조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