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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연구
- 주제오대산 상원사 진여원과 조선시대 불교조각 학술세미나
- 시대신라시대
- 저자강삼혜(국립경주박물관)
목차
위로 가기 오대산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연구강삼혜(국립경주박물관)
Ⅰ. 머리말
Ⅱ. 『오대산사적』과 중대 사자암 중창 기록
Ⅲ.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 자료와 도상 특징
Ⅳ.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양식 및 제작 시기 검토
Ⅴ. 맺음말
상세소개
위로 가기오대산 중대(中臺) 사자암(獅子庵)과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자장(慈藏) 이후 신라 중대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오대산 불교를 대표하는 곳이자, 오대산 문수신앙의 중심되는 곳이었다. 오대산은 중대신라기 보천(寶泉, 寶叱徒)과 효명(孝明)태자가 수행하면서 화엄신앙을 공고히 하였으며, 효명태자(성덕왕)가 왕이 된 후 705년 (성덕왕4) 진여원(眞如院)을 개창했다. 고려 말~조선 초에는 왕사 나옹(懶翁)이 오대산에서 수행하면서 그의 문도들이 머물렀으며, 이후 나옹의 문도인 각운설악 (覺雲雪嶽)의 건의로 1400년(정종2) 태상왕이 된 이성계가 사자암을 중창하고, 이어 세조가 1466년(세조12) 사자암과 보궁을 참배하는 등 대대로 국가의 보비 (補裨) 사찰이었다 중대 사자암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적멸보궁을 관리하고 예불(禮佛)드리는 승려가 머무는 곳이었다. 사자암 명칭에 대해서는 『오대산사적』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 있으면서 사자 한 마리를 얻어 부처님 정골사리를 싣고 돌아와 오랫동안 그곳에 주석하였기에 사자암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전하고 있어, 사자암사명(寺名)에서도 진신사리와의 관련성이 엿보인다.
이 논고에서 살펴볼 중대 사자암에 봉안되었던 목조비로자나불좌상(木造毘盧遮 那佛坐像)은 현재 월정사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높이 38cm의 아담한 크기이다. 그동안 조선 후기 불상으로 간주되어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최근 중수발원문(1894), 개금발원문(1908)과 함께 1456년(세조2)에 판각된 다라니 1 매가 발견되어 조선 전기 불상으로 추정되었다. 양식적으로도 불상의 낮은 무릎 높이나 머리를 숙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 모습 등에서 첫눈에도 조선 후기 불상과는 구별되었다. 또한 가슴에 양감이 표현되어 있고, 내의(승각기)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는데, 띠매듭은 16세기 이후 불상에서는 거의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권근(權近)의 「오대산 사자암 중창기(五臺山獅子庵重創記)」에는 이성계가 사자암이 빈터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장(工匠)을 보내 건물 두 채를 짓게 한기록이 전한다. 그해 11월 이성계는 친히 낙성식에 행행(行幸)한 후 권근에게 기문을 쓰게 하는데, 기문에는 세 칸 건물은 부처를 안치(安置)할 법당과 승방(僧 房)으로, 아래 두 칸 건물은 문간과 세각(洗閣)으로 건물을 새로 세웠다고 전한 다. 이로 보아 이 사자암 비로자나불상은 1400년 당시 중창한 법당에 봉안했던 불상일 가능성도 있으며, 1456년 인출된 복장 다라니의 존재로 인해 15세기 중후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논문에서는 이 두 시기에 주목하여 관련 기록과 양식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제작 시기를 추정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