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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 좌상의 복장물과 중수 기록 분석

  • 주제오대산 중대 적멸보궁 학술세미나
  • 시대현대시대
  • 저자유근자(국립순천대학교 학술연구교수)
목차
위로 가기 오대산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 좌상의 복장물과 중수 기록 분석
유근자(국립순천대학교 학술연구교수)
Ⅰ. 머리말
Ⅱ.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물 수구다라니
Ⅲ.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중수 기록 분석
Ⅳ. 맺음말

상세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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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중대 사자암은 태조 이성계의 원찰로 잘 알려져 있으며 권근이 지은 「오대산 사자암 중창기(五臺山獅子庵重創記)」가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1401년에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을 시켜 권근(權近, 1352~1409)으로 하여금 「오대산 사자암 중창기」를 짓게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사자암은 “대(臺)의 남쪽에 위치했는데 대[중대]에 오르내리는 이는 모두 거쳐가는 곳이고, 창건한 지 오래되어서 터만 남아 있으니…내가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공장(工匠)을 보내 중건하였다. 위에 3칸은 부처를 봉안 하고 승방으로 쓰기 위한 것이요 아래 두 칸은 문과 목욕간으로 만들었다…공사를 마친 다음 그해 겨울 11월에 친림해 낙성했는데 세상을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추념(追念)하고, 후세에까지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부처의 은덕에 젖고, 유명(幽冥)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라는 내용을 통해 사자암 중창의 과정과 목적을 유추할 수 있다.

적멸보궁이 있는 중대의 남쪽에 위치한 사자암은 조선 전기부터 중대에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거쳐가는 길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자암은 왕실에서 내려보낸 장인에 의해 중건된 점이 주목된다. 가람 배치는 상하로 이루어졌는데 불상을 봉안하고 승려가 거주하는 3칸의 인법당은 위쪽에, 문과 목욕간은 아래쪽에 위치 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바는 3칸의 건물을 지은 후 불상을 봉안했다는 기록이다.

중대 사자암 향각(香閣)에는 「오대산 중대 사자암 중창기」의 기록에 부합하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졌다. 이 불상은 현재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조선시대 왕실 원당으로서의 사자암의 성격과 사자암에 봉안되었던 목조비로 자나불좌상의 제작 시기 및 양식 특징에 대해서는 2022년과 2023년 학술대회후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이에 본 발표에서는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으로 납입되었던 ‘수구다라니(隨求陀羅尼)’가 오대산 신앙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불복장으로 납입된 의미를 재고하고자 한다. 또한 조성 당시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1894년과 1908년의 중수 기록을 분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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